
글로벌 주류업체 디아지오가 캐나다의 상징적 위스키 브랜드 '크라운 로얄' 생산시설을 미국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하면서 캐나다 전역에 격렬한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 1939년 영국 왕실 방문을 기념해 탄생한 이 브랜드가 86년 만에 캐나다를 떠나게 되면서 국민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디아지오는 지난달 온타리오주 애머스트버그 공장을 내년 2월 폐쇄하고 병입 공정을 미국으로 옮긴다고 발표했다. 1970년부터 55년간 운영된 이 시설에서는 숙성된 위스키 원액을 희석하고 병에 담는 핵심 제조과정이 이뤄져 왔다. 회사 측은 "공급망 효율성 향상과 미국 소비자와의 거리 단축"을 이유로 들었지만, 실제로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 불확실성을 회피하려는 전략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캐나다 법률상 증류와 숙성만 자국에서 이뤄지면 '캐나다 위스키' 표기가 가능하다. 디아지오는 매니토바주 김리와 퀘벡주 밸리필드에서 원액 생산은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위스키 업계에서 병입까지 포함한 전 공정의 현지화는 브랜드 진정성의 핵심 요소로 여겨진다. 조니 워커나 제임슨 같은 유명 브랜드들이 모든 제조 단계를 자국에서 완성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크라운 로얄의 정체성 훼손 우려가 크다. 캐나다산 곡물과 매니토바주 위니펙 호수 물로 만들어진 전통이 미국 생산으로 인해 사라지기 때문이다. 24년간 해당 공장에서 근무한 직원은 현지 언론에 "미국 물을 사용하면 진정한 캐나다 위스키가 아니며 맛과 품질 일관성을 보장할 수 없다"고 우려를 표했다.
업계에서는 디아지오의 결정 배경으로 무역 분쟁 리스크 완화와 비용 절감을 꼽는다. 현재 USMCA 협정으로 캐나다산 위스키는 무관세 혜택을 받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예측 불가능한 관세 정책으로 언제든 상황이 바뀔 수 있다. 원액을 미국에서 병입하면 미국산으로 분류돼 이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크라운 로얄의 최대 시장인 미국 내에서 직접 생산해 물류비용을 줄이고, 노조 영향력이 약한 남부 지역에서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다.
하지만 캐나다 정치권과 국민들의 분노는 거세다. 더그 포드 온타리오 주총리는 기자회견장에서 크라운 로얄 병을 땅에 쏟아부으며 "디아지오 경영진은 망치 자루만큼 멍청하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온타리오주 관영 주류 판매점 LCBO에서 디아지오 제품 전체를 퇴출하는 강경책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현재 온타리오주는 디아지오에 연간 7억4000만 캐나다달러 규모를 구매하는 핵심 시장이다.
현지 식당들이 크라운 로얄을 사용한 요리를 메뉴에서 제외하는 등 민간 차원의 불매운동도 확산되고 있다. 영국 가디언은 이번 사태가 미국 보호무역주의에 강력히 맞서는 포드 주총리의 정치적 입지와 맞물려 양국 간 무역 갈등에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분석했다.
한편 이런 상황에서도 캐나다 관광업계는 한국과의 협력 강화에 나서고 있다. 캐나다관광청은 최근 서울에서 팬데믹 이후 최대 규모의 세일즈 미션을 개최했다. 13개 캐나다 파트너사가 참여한 이번 행사에서는 한국 여행업계와의 협력 확대 방안을 논의했다. 글로리아 로리 캐나다관광청 수석 부사장은 "아시아 지역에서 한국이 캐나다 여행 소비 회복을 주도하고 있다"며 지속적인 파트너십을 강조했다.
크라운 로얄 공장 이전 논란은 단순한 기업 결정을 넘어 브랜드 정체성과 국가적 자존심이 얽힌 복합적 사안으로 발전했다. 86년간 축적된 브랜드 유산과 소비자 신뢰를 단기적 비용 절감을 위해 희생했다는 비판 속에서, 디아지오가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