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대규모 공급 확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진행 중인 구조조정 과정에서 신용 위험이 동종 업계 전반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제기됐다. 개별 기업에서 발생한 크레딧 충격이 유사한 사업 구조와 재무 여건을 보유한 다른 기업들로 전파되면서 연쇄적인 등급 하향 조정을 야기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지형삼 NICE신용평가 기업평가본부 책임연구원은 17일 한국거래소 서울사무소에서 개최된 'NICE신용평가 크레딧 세미나 2025'에서 "핵심자산인 NCC설비 매각이나 분할 시 표준 사채관리 규정에 의한 조기상환청구권과 상법상 연대상환의무가 발생한다"며 "비주력사업부 자산 처분 등을 통한 자구책 이행으로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와 PRS 계약 관련 최종 매각 여부 및 매각 조건 변경 사항 등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광의의 부도 상황에 해당할 경우 신용등급 하락 조정 가능성이 있다"며 "개별 기업의 재무건전성과 계열사 지원 능력 등에 따라 신용등급 조정 규모가 상이하겠지만, 비슷한 크레딧 리스크가 동일 업종 기업들로 전이될 위험이 상존한다"고 덧붙였다.
국내 석유화학 산업은 중국의 생산능력 급증에 따른 수익성 하락으로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고 있다. 지 연구원은 "에틸렌을 중심으로 아시아 지역 내 공급 과잉이 심화되고 있다"며 "최근 5년간 중국의 에틸렌 생산능력이 약 2500만톤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또한 "증설 3기에 해당하는 2025~2027년 기간 중 에틸렌은 3000만톤, 프로필렌은 2200만톤이 추가 증설될 예정"이라며 "말 그대로 공급 폭탄으로 가동률 추가 하락과 수익성 저하가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전망했다.
NICE신용평가는 한국의 석유화학 경쟁력이 지역 내 경쟁국인 중국과 일본에 비해 열세에 있다고 판단했다. 범용 제품 부문에서는 중국에, 스페셜티 부문에서는 일본에 비해 경쟁력 확보가 미흡해 구조적 취약점이 부각되고 있다는 평가다.
지 연구원은 "사업 규모 측면에서 중국은 한국과 일본에 비해 압도적인 외형을 확보하고 있다"며 "산업 육성 정책과 국영기업 주도의 대규모 설비 투자를 바탕으로 경쟁국들과의 격차를 지속적으로 확대해왔다"고 분석했다.
반면 "일본은 2000년대 후반부터 범용 석유화학 부문의 선제적 구조조정을 추진함에 따라 고부가 스페셜티 중심의 포트폴리오 전환과 높은 자급률 등을 기반으로 수익성 개선에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한편 최근 대두된 미국 정부의 관세 부과에 따른 직접적인 타격은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지 연구원은 "한국산 정유화학 제품은 미국 수출 시 관세 면제 대상에 해당한다"며 "수출 감소와 마진 저하 등 간접적인 우려 요인은 존재하지만 직접적인 타격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자동차, 철강, 이차전지 산업 전망도 함께 논의됐다. 자동차 산업의 경우 미국 정부의 관세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대차와 기아의 포트폴리오와 재무 역량을 감안할 때 충격은 제한적일 것으로 전망됐다.
박세영 NICE신용평가 기업평가본부 실장은 "관세 부담 노출 수준은 높은 편이나 판매 지역 구성과 제품 구성 등이 우수해 수익성 하락에 대한 대응 능력이 뛰어나다"며 "경쟁사 대비 우수한 재무적 여력을 바탕으로 생산시설 확장과 공급망 재편 등 투자 부담에 대응할 전망"이라고 밝혔다.
철강 업종은 중국 내 수요 둔화 지속과 경쟁 심화로 신용등급 하방 압력이 확대될 것으로 내다봤다. 송동환 NICE신용평가 기업평가본부 책임연구원은 "철강재 유통 가격 하락과 무역 장벽에 따른 수출 제약 심화, 경쟁력 확보를 위한 투자 부담 증가가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이차전지 부문은 우호적 통상 환경에도 불구하고 경쟁 심화와 가격 압박으로 당분간 뚜렷한 실적 개선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왔다. 신호용 NICE신용평가 기업평가본부 책임연구원은 "한국 기업은 다각화된 해외 생산 거점을 바탕으로 중국 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면서도 "소형 전기차 선호도 증가로 중대형 전기차 위주의 포트폴리오를 갖춘 한국 배터리사 가동률 제고는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