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상장사들이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담은 3차 상법 개정안 통과를 앞두고 보유 중인 자사주 처분에 나서면서 증시가 요동치고 있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 분석 결과, 현재 상장기업들이 의무적으로 없애야 할 자사주 규모는 총 72조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국내 R&D 상위 1000개 기업의 연간 연구개발 투자비용과 맞먹는 수준이다.
9월 정기국회에서 논의 예정인 개정안은 기업들로 하여금 보유 자사주를 일정 기간 내 완전히 소각하도록 강제한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들을 중심으로 발의된 법안들은 소각 시한을 즉시부터 1년까지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으나, 1년 이내 처리가 가장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제도 변화를 앞두고 기업들은 세 가지 대응책을 구사하고 있다. 우선 미리 자사주 비중을 줄이거나, 교환사채 발행을 통해 현금화에 나서는 기업들이 급증했다. 올해 자사주를 기초자산으로 한 EB 발행 건수는 80여 건으로, 작년 전체 건수를 이미 50% 이상 웃돌았다. KCC는 최근 4300억원 규모의 대형 EB 발행을 추진하고 있으며, 대교와 넥센 등도 잇따라 이 같은 움직임에 합류했다.
시장에서는 이를 '막차 효과'로 분석한다. 법 시행 이후에는 자사주 활용도가 현저히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기업들이 마지막 기회를 잡으려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영증권(53.1%), 조광피혁(46.6%) 등 자사주 비중이 높은 업체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한편 일부 기업들은 선제적 소각을 통해 개정안 충격을 완화하려 한다. LG는 올해 2500억원 상당의 자사주를 소각했으며, 2026년까지 보유분 전량을 없앤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휴비츠 역시 최근 58억원 규모 자사주 소각을 공시하며 주주가치 제고 의지를 드러냈다.
증권업계는 단기적으로 이번 개정안이 증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한다. 발행 주식 수 감소로 주당 가치가 상승하고, 주당순이익과 자기자본이익률 개선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9월 들어 코스피는 주요국 증시 중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며 3400선을 돌파했다.
그러나 재계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대한상공회의소는 "강제 소각이 오히려 자본시장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며 신중한 접근을 당부했다. 기업들이 아예 자사주 매입을 포기할 경우 주가 부양 효과가 사라지고, 경영권 공격에 무방비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우려다.
특히 자사주는 그동안 기업들이 급작스러운 위기상황 대응이나 M&A, 임직원 보상 등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해온 전략적 자산이었다. 상장회사협의회는 "이번 개정으로 기업들의 자금 조달 최후 수단이 봉쇄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현재 중립적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는 "기업과 시장의 다양한 의견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겠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현 정부의 증시 활성화 의지와 1·2차 개정안의 순조로운 통과 과정을 고려할 때, 3차 개정안 역시 결국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시장의 중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