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번역가 데버라 스미스 "이제 뛰어난 한영 번역가들이 많이 생겨났다"

2025.09.21
한강 번역가 데버라 스미스 "이제 뛰어난 한영 번역가들이 많이 생겨났다"

한강 작가의 장편소설 '채식주의자'를 영역하여 2016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공동 수상한 영국의 번역가 데버라 스미스(38)가 지난 20일 화상 강연을 통해 변화한 한국 문학의 국제적 지위에 대해 언급했다. 서울 용산구 현대카드스토리지에서 진행된 '2025 현대카드 다빈치모텔' 프로그램의 하나로 열린 이번 행사에서 스미스는 "처음 번역 일을 시작했을 당시 저를 움직인 동기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소개하고 싶다는 열망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현재 인도에 거주 중인 스미스는 원래 5년 만에 한국을 직접 방문할 계획이었으나, 몇 주 전 영국에 살던 부친의 별세로 인해 화상으로 한국 독자들과 만났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후 한국 대중과 처음으로 소통하는 자리였던 이번 강연에서 그는 "한국말로 인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이라며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스미스는 자신이 번역 활동을 하던 기간 동안 서구 문화계에서 한국의 입지가 근본적으로 변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제가 거주하는 지역 주변에 한국 식품을 판매하는 대형 마트가 새롭게 개점했고, 런던에도 한국 뷰티 브랜드 매장이 들어서는 등 일상에서도 한국 문화의 확산을 체감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가장 의미 있는 변화는 한국어에서 영어로 작품을 옮기는 실력 있는 번역가들이 대폭 늘어났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수많은 한국 작품 중 '채식주의자'를 선택한 이유에 대한 질문에는 흥미로운 답변을 내놓았다. "많은 분들이 제가 수백 권의 도서를 검토한 후 신중하게 결정했을 것으로 추측하시지만, 실제로는 제가 접한 두 번째 한국 소설이었습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설령 수많은 작품을 비교 검토했더라도 결국 '채식주의자'를 택했을 것"이라며 "그 작품과 한강 작가의 문체에서 특별한 유대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한강 문학의 특성에 대해서는 "그녀의 글은 극도로 시각적이며 감각에 호소하는 특징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한 "문학 창작은 단순한 지적 행위가 아니라 근본적인 윤리적 탐구이며, 한강은 바로 이런 탐구에 깊이 천착하는 작가"라고 평가했다. 그는 "작품들이 때로는 폭력적이고 극한적이며 자극적인 내용을 다루지만, 이는 독자와의 진정한 소통을 위한 매우 도덕적인 선택으로 여겨진다"고 해석했다.

영국 출판계의 구조적 한계에 대해서도 솔직한 견해를 피력했다. 한국계 번역가 안톤 허의 발언을 언급하며 "출판업계와 번역업계에는 식민주의 시대의 잔재와 인종적 편견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과거 한국어 번역자가 부족했던 근본 원인은 역량 부족이 아니라 진입 장벽 때문이었으며, 백인이면서 영어 모국어 화자이자 영국 거주자인 제가 번역하는 것이 훨씬 용이했다"고 털어놨다.

번역 기법에 관해서는 독특한 철학을 보여줬다. 그는 영역본에서 'soju', 'manwha' 같은 한국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편집자가 'manwha'를 'manga'로 바꿔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했다"며 "번역가들은 원작의 문화적 색채를 최대한 보존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거리 단위 '리'를 '킬로미터'나 '마일'로 바꾸지 않는 것도 "독자들이 다른 나라에는 서로 다른 측정 체계가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최근에는 장편소설보다는 동화와 시 번역에 집중하고 있다는 스미스는 "알려지지 않은 문화를 소개한다는 사명감으로 일해왔지만, 이제는 제가 번역 작업에 참여하든 하지 않든 큰 차이가 없어졌다"며 웃음을 지었다. 그는 "현재 한강 작가 작품의 번역자는 전 세계적으로 50명을 넘을 것"이라며 "이런 기회를 제공해준 한강 작가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부커상 수상 후 제기되었던 오역 논란에 대해서는 "번역은 단어의 의미만을 기계적으로 옮기는 작업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각 언어마다 고유한 역사와 문장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때로는 직역이 오히려 원작의 진의에서 멀어질 수 있다"고 설명하며 번역의 본질적 어려움을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