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외환위기 기억해야 할 때, 한국 정부 무제한 통화스와프 카드 꺼내들어

2025.09.21
IMF 외환위기 기억해야 할 때, 한국 정부 무제한 통화스와프 카드 꺼내들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고율 관세 압박이 지속되면서 한미 관계에 새로운 긴장이 조성되고 있다. 한국 정부는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펀드 조성 요구와 25% 관세 중 택일하라는 미국의 압박에 직면해 있다. 이는 한국 외환보유고의 84%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으로, 2025년 정부 예산의 72%에 달하는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1990년대 말 금융위기와 유사한 상황적 배경에 주목하고 있다. 김정식 연세대 명예교수는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이 양국 관계 경색 상황에서 발생했음을 고려할 때, 미국과의 마찰이 어떤 불이익을 초래할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대북정책을 둘러싼 견해차로 미국과 갈등을 빚었고, 1997년에는 주한미국대사직이 1년간 공석으로 남기도 했다.

현재 미국이 요구하는 직접투자 방식은 한국 금융시장에 심각한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3500억 달러가 일시에 해외로 유출될 경우 원화 가치 급락과 함께 수입 인플레이션이 촉발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서도 신성환 위원이 "대규모 투자펀드 실행 시 환율 상승 압력이 우려된다"며 경고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새로운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이 무제한 통화스와프 체결 요청이다. 이는 원화를 담보로 달러를 차입해 투자하는 방식으로, 국내 외환보유액을 직접 소진하지 않으면서도 대미 투자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다. 한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20년 팬데믹 시기 한시적으로 미국과 통화스와프를 체결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미국의 상설 통화스와프 대상국은 일본, 영국, 캐나다, 스위스, 유럽연합 등 주요 기축통화국에 국한되어 있어 한국의 요청이 수용될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정환 한양대 교수는 "무제한 스와프는 글로벌 금융 안전망 차원의 협정으로, 한국과의 체결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전망했다.

일본의 사례는 한국과 대조적이다. 일본은 5500억 달러 투자를 약속하며 자동차 관세를 27.5%에서 15%로 인하받았다. 일본이 이같은 조건을 수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조3242억 달러의 방대한 외환보유고와 미국과의 무제한 통화스와프가 있다. 또한 엔화 시장의 일평균 거래규모가 1조2500억 달러에 달해 대규모 자금 이동을 흡수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반면 원화 시장의 일평균 거래량은 1420억 달러 수준에 그쳐 상대적으로 취약한 구조를 보인다. 김태황 명지대 교수는 "일본의 불합리한 요구 수용이 이해되지 않지만, 자동차 관세에서 한국보다 우위를 점하려는 계산이거나 향후 재협상 기회를 노리는 전략일 수 있다"고 해석했다.

미국 조지아주에서 발생한 한국 노동자 집단 구금 사태도 협상 분위기에 악영향을 미쳤다. 300여 명의 기술자들이 수갑과 족쇄를 착용한 채 송환되는 과정이 알려지면서 국내 여론이 악화됐고, 이재명 대통령도 "기업들의 대미 투자 주저 가능성이 커졌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전문가들은 투자 시기와 대상을 조율하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박인휘 이화여대 교수는 "미국이 관세 협상의 본보기를 만들려는 상황에서 직접투자 조건 철회는 어려울 것"이라며 "중간선거 등 정치 지형 변화를 활용해 투자 조건과 일정을 조율하며 시장 충격을 완화하는 방안이 현실적"이라고 제안했다.

한국 정부는 시한에 쫓겨 불리한 합의를 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견지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익에 반하는 결정은 절대 하지 않는다"며 "합리성과 공정성을 벗어난 협상은 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이달 말 유엔총회에서 양국 정상이 만날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지만, 근본적인 조건 차이가 해소되지 않는 한 돌파구 마련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