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알카에다 연계 테러리스트였던 아메드 알샤라(42) 시리아 임시대통령이 이번 주 유엔총회 연설자로 국제사회 앞에 서게 된다. 시리아 국가원수의 유엔총회 연설은 1967년 이후 무려 58년 만의 일이다.
뉴욕타임스는 알샤라의 변화 과정을 목격했거나 그와 접촉했던 70여 명의 증언을 통해 이 인물을 '지능적이고 야망이 큰 변신술의 달인'으로 규정했다. 외교적 수완과 매력, 교활함과 잔혹함을 동시에 갖춘 그의 극적인 변화는 중동 격변기를 헤쳐나가기 위한 생존 전략에서 비롯됐다고 분석된다.
1982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중산층 시리아 가정에 태어난 알샤라는 유년시절을 다마스쿠스에서 보냈다. 경제학자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독서를 즐기는 내성적인 성격이었으나, 20세가 되면서 돌연 행방을 감췄다. 이웃 마야 아템은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감춰버렸고, 심지어 그의 모친조차 생사를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재등장한 무대는 2003년 미군이 점령한 이라크였다.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에 가담한 그는 2005년 미군에 붙잡혀 6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당시 동료 수감자였던 이라크 부족 지도자 무자힘 알후와이트는 알샤라가 '암자드 무다파르'라는 거짓 이름으로 자신을 이라크 대학생이라고 속였다고 증언했다. 그의 이라크 사투리는 너무도 자연스러워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2011년 시리아 내전 발발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알샤라는 알카에다 계열 조직 '누스라 전선'을 결성했다. '아부 모하메드 알줄라니'라는 새로운 가명 하에 그는 2012년 초부터 시리아 주요 도시들에서 참혹한 자폭 테러를 주도하며 조직을 확장시켰다. 누스라 전선은 기독교도들의 십자가와 교회 종소리를 금지하고 반대세력을 살해·구속하는 극단 통치를 펼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알샤라는 서서히 극단주의 노선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과거 납치했던 가톨릭 신부 한나 잘루프에게 이슬람 성직자들을 통해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고, 기독교도들로부터 몰수했던 재산을 되돌려주었다. 잘루프 신부는 "이 사람은 믿을 만하며 약속을 지키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2013년 아부 바쿠르 알바그다디가 악명높은 이슬람국가(IS)를 창설할 때도 알샤라는 거리를 두었으며, 2016년 7월 아예 알카에다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했다. 이후 그는 시리아 북부 4개 반군 조직을 하나로 묶어 하야트타흐리르알샴(HTS)을 출범시켰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튀르키예의 영향이 컸다. 시리아 난민 사태로 어려움을 겪던 튀르키예는 알샤라를 가장 유망한 협력 파트너로 보고 극단주의 포기를 조건으로 지원을 제공했다. 알샤라는 점차 강경파를 억누르는 데 힘을 쏟으며 서방 국가들과의 대화 채널을 모색했다.
로버트 포드 전 주시리아 미국대사는 2023년 알샤라와의 만남에서 그가 다마스쿠스 점령과 시리아 통치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고 전했다. 당시 허황된 꿈으로 여겨졌던 그의 계획은 지난해 12월 바샤르 알아사드 독재정권 축출로 현실이 됐다.
군복을 정장으로, 가명을 본명으로 바꾼 알샤라는 이제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제재 해제를 이끌어내며 이스라엘과의 관계 개선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23일 뉴욕에서 열린 콩코디아서밋에서 그는 "시리아 주권 보장과 이스라엘 안보 우려 해소를 위한 협정 체결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다만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간 관계정상화 틀인 '아브라함 협정' 참여에 대해서는 "협정 가입국들은 이스라엘의 인접국이 아니지만 시리아는 상황이 다르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이스라엘이 골란고원을 통해 시리아에 1천 회 이상의 공습과 침투를 감행했다"며 "이스라엘 영토 철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포드 전 대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알샤라가 실용주의를 가장한 강경 이슬람 지하디스트라기보다는 안정적 정부 구축을 추구하는 권력 지향적 권위주의자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최근 종파 간 폭력 사태가 불거지면서 그의 변신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