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전문직 H-1B 비자 수수료를 기존 1000달러에서 10만달러로 100배 급등시키자, 세계 각국이 이를 고급 인력 확보의 절호 기회로 활용하고 나서고 있다. 미국의 강경한 출입국 정책이 오히려 글로벌 인재 쟁탈전의 판도를 바꾸는 계기가 되면서 '역 두뇌유출' 현상이 가시화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23일 한국·영국·중국·독일 등 주요국들이 미국의 이민 장벽 강화를 틈타 과학자와 공학자 영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인공지능과 첨단기술 분야의 전문가들이 미국을 떠날 준비를 서두르면서 각국의 유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은 22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글로벌 이공계 인력을 국내로 끌어올 기회"라며 각 부처에 구체적 방안 마련을 주문했다. 정부는 기술 주도형 초혁신 경제 구현을 위해 AI 대전환 분야에 내년도 예산을 집중 배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대한상공회의소 조사에 따르면, 2024년 우리나라는 인구 1만명당 AI 전문가 0.36명이 해외로 이탈해 OECD 38개 회원국 중 35위에 그쳤다. 룩셈부르크가 8.92명 순유입을 기록하고 미국(1.07명), 독일(2.13명) 등이 상위권을 차지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정부는 지난해 9월 세계 100대 대학 출신 외국 엔지니어를 겨냥한 'K-테크 패스' 비자를 신설하며 2030년까지 1000건 발급을 목표로 설정했다.
영국은 키어 스타머 총리가 직접 나서 '글로벌 인재 태스크포스'를 가동하며 세계 정상급 과학자·학자·디지털 전문가 유치에 속도를 내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현재 766파운드인 글로벌 인재 비자 수수료 완전 폐지안이 본격 검토되고 있다. 이런 논의는 트럼프 행정부의 비자 수수료 인상 이전부터 진행됐지만, 미국의 조치가 영국 내 개혁 움직임에 "추진력"을 제공하고 있다는 평가다.
중국은 다음달 1일부터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분야 전문가를 위한 새로운 비자 제도를 시행한다. 이 비자를 받으면 사전 취업 제안이나 연구직 확보 없이도 입국해 학습과 구직 활동이 가능하다. 궈자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전 세계 각 산업·분야의 우수한 인재들이 중국에 정착하는 것을 환영한다"며 적극적인 환영 의사를 표했다.
독일 디지털산업연합회 비트콤의 베른하르트 로흐레더 대표는 "미국의 새로운 정책이 독일과 유럽에게 세계 인재를 끌어들이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아랍에미리트(UAE) 등 중동 국가들도 반사이익을 기대하며 기업과 전문가들의 이주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테크 업계에서는 이미 구체적인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영국 핀테크 기업 클레오의 창업자 바니 허시요는 "H-1B 혼란 이후 세계 최고 대학 컴퓨터공학 전공자와 엘리트 테크 기업 재직자들로부터 1000건 이상의 연락을 받았다"고 밝혔다. 업계는 각국 정부에 더욱 과감한 우대 조치와 글로벌 수준의 보상 패키지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로이터는 "한국을 포함한 다수 국가가 미국의 강경한 이민 정책을 자국에 유리하게 활용해 외국인 과학자와 엔지니어를 유치하고, 자국 산업 발전과 함께 인재 유출 흐름을 되돌리려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의 비자 장벽이 높아질수록 글로벌 인재 쟁탈전의 양상은 더욱 복잡해질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