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달러화의 광범위한 약세 흐름에도 불구하고 원·달러 환율이 4개월 만에 1400원대로 상승하며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25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5.5원 오른 1403원에 개장했으며, 전날 야간거래에서는 1403.8원으로 마감해 지난 5월 이후 처음으로 심리적 저지선을 넘어섰다.
환율 상승의 핵심 동력은 원화 고유의 약세 압력에서 비롯되고 있다. 2020년 1월 이후 원·달러환율 변동의 93%가 원화 자체의 약세에서 기인한 것으로 분석되는 만큼, 달러화 강세보다는 한국 경제에 대한 근본적 우려가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이다. 원화는 현재 주요국 통화 중 일본 엔화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폭의 가치 하락을 기록하고 있다.
연방준비제도의 기준금리 인하에도 불구하고 제롬 파월 의장이 추가 완화에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면서 달러화가 다시 강세 압력을 받고 있다. 파월 의장은 최근 "단기적으로 인플레이션 위험은 상방으로, 고용 위험은 하방으로 치우쳐 있는 상황"이라며 통화정책 운용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와 함께 독일 기업심리 지표 악화로 인한 유로화 약세도 상대적으로 달러화 가치를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국내 요인 역시 환율 상승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다.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협상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시장에 부담으로 작용하는 가운데, 외국인 투자자들의 매도세가 확산되고 있다. 전날 유가증권시장에서 외국인은 2016억원을 순매도하며 코스피 지수를 3472.1로 끌어내렸다. 9월 들어 약 7조원의 순매수를 기록했던 외국인 자금이 매도 우위로 전환되면서 환율 상승에 추가적인 압력을 가하고 있다.
한미 통상협상의 장기화 가능성도 원화 약세 요인으로 지목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뉴욕에서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과의 면담에서 "한국은 경제 규모와 외환시장 측면에서 일본과 크게 다르다"며 한국 상황의 특수성을 강조했지만, 구체적인 해결책 마련에는 시간이 소요될 전망이다.
서학개미로 불리는 국내 투자자들의 미국 주식 투자 확대도 구조적인 달러 수요 증가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9월 한 달간 국내 투자자들이 16억2600만 달러 이상의 미국 주식을 순매수하면서, 외국인의 국내 증시 투자 자금을 상쇄하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
금융시장 전문가들은 환율의 추가 상승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문다운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심리적 저항이 컸던 1400원이 돌파된 만큼 다음 유의미한 상단은 1420원"이라며 "대미투자 협상 불확실성이 당분간 환율 상방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당국의 시장 개입 가능성과 수출업체들의 달러 매도 물량 출회 등이 급격한 상승을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현재의 환율 상승은 단순한 통화 현상을 넘어 한국 경제의 저성장 우려를 반영하는 신호로 해석되고 있다. 민간부문의 과도한 부채 부담과 수출 부진이 겹치면서 성장 동력이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외환시장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점을 먼저 감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성장 촉진 정책에 앞서 경제의 불확실성을 제어하는 경제안보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