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사대금 소멸시효가 완료된 이후 채무자가 미지급 사실을 승인하며 여러 차례 사과했다고 해도 시효완성으로 얻는 법적 이익을 포기했다고 추정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확정됐다.
대법원 3부는 A건설회사가 B씨를 대상으로 제기한 공사대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원심을 파기하고 창원지법으로 환송한다고 23일 발표했다. 이번 판결은 주심 이흥구 대법관이 맡았다.
사건의 경위를 살펴보면, A사는 2013년 8월 B씨로부터 경남 거제시 옥포동 토지에 10억1200만원 규모의 숙박시설 건축공사를 수주받아 같은 해 12월 완공했다. 하지만 B씨는 전체 공사비 중 9억6050만원만 지급하고 잔여 5150만원은 주지 않았다.
A사는 2019년 10월 미납된 공사비와 지체상금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공사대금 채권의 소멸시효가 3년인 점을 감안하면 이미 시효가 끝난 상황이었다. B씨는 시효 완료를 근거로 지급 거부 입장을 밝혔다. 반면 A사는 B씨가 시효 만료 후에도 채무를 인정하고 사과함으로써 시효혜택을 스스로 포기했다고 맞받아쳤다.
1심 법원은 B씨에게 A사가 요구한 5150만원과 지체상금 지급 명령을 내렸다. 2심도 B씨의 항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심 재판부는 "채무자가 소멸시효 만료 이후 채무를 승인하면 시효 완료 사실을 알고 그 혜택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기존 법리를 적용했다.
특히 2심은 B씨 측 법정대리인이 2023년 11월 A사 대표에게 공사비 5150만원을 지급하지 않았음을 시인하며 반복적으로 사과한 점에 주목했다. 재판부는 "피고는 공사비 미납 사실을 시인해 채무를 승인했으며, 미지급에 대해 반복 사과함으로써 시효혜택을 포기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의 시각은 달랐다. 대법원은 소멸시효 중단 사유인 채무승인과 시효혜택 포기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무승인은 소멸시효 만료 전에 채무자가 상대방의 권리나 본인의 의무 존재를 알고 있다는 뜻을 나타내는 관념적 통지다. 반면 시효혜택 포기는 소멸시효 만료 후 채무자가 소멸시효 완료를 알면서도 이로 인한 법적 혜택을 받지 않겠다는 효과의사를 표현하는 의사표시다.
대법원은 "시효혜택 포기는 단순히 채무에 관한 인식을 나타내는 것을 넘어서, 본인에게 법적으로 보장된 시효혜택 포기라는 법적 효과를 의욕하는 효과의사 표시가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피고 법정대리인이 공사비 미납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더라도, 그 행위의 진정한 의도가 시효혜택 포기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봤다. 또한 시효만료 사실을 알면서 사과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원심은 채무승인을 하거나 채권자에게 사과한 사실로부터 곧바로 시효만료 사실을 알고도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보아 피고의 소멸시효 완료 주장을 배척했다"며 "이러한 원심판단에는 시효혜택 포기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판결은 지난 7월 24일 선고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근거한 것으로, 시효혜택 포기에 대한 대법원의 엄격한 기준을 보여준다. 단순한 채무 인정이나 사과만으로는 시효혜택을 포기했다고 볼 수 없으며, 명확한 효과의사가 표현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