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번방 사건을 계기로 시행된 디지털 성범죄 대상 신분은닉수사가 도입 5년 만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2021년 9월 제도 시행 이후 현재까지 총 765건의 은밀수사를 진행해 2171명을 체포하고 이 중 130명을 구속했다고 23일 발표했다.
이 제도는 2018년부터 2020년까지 발생한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들, 특히 박사방과 N번방 사건의 충격적 실상이 드러나면서 마련됐다. 당시 가해자들이 SNS를 통해 피해자들에게 접근하여 개인정보를 획득한 후 유인과 협박으로 성착취 콘텐츠를 제작해 유포한 사건들은 사이버 공간 범죄의 심각성을 여실히 보여줬다.
정부는 이후 청소년성보호법 개정을 통해 2021년 9월부터 아동·청소년 대상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신분비공개수사 및 신분은닉수사 규정을 새로 만들었다. 신분비공개수사는 수사관이 경찰 신분을 드러내지 않거나 부정하는 방식이고, 신분은닉수사는 가짜 신분으로 위장해 거래나 계약을 체결하는 방식이다.
수사관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텔레그램 대화방 등 성범죄 유통 경로에서 가명 신분으로 불법 촬영물을 구매하거나 판매하는 척하며 범죄 소탕을 위한 증거와 자료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모든 조치는 아동·청소년 대상 디지털 성범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법정 증거력을 갖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한 수사 특례 조항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구체적인 검거 현황을 살펴보면, 전체 체포자 2171명 중 판매·유포 등 배포 혐의자가 1363명(62.8%)으로 최대 비중을 차지했다. 이어 구매·보관·시청 등 혐의자 530명(24.4%), 제작 등 혐의자 211명(9.7%), 성착취 목적 대화 혐의자 67명(3.1%) 순으로 확인됐다.
올해부터는 이 제도의 적용 범위가 성인 피해자 사건까지 확장됐다. 기존 신분은닉수사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미성년자인 경우에만 가능해 성인 피해자 사건에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작년 하반기부터 인공지능 조작 영상, 즉 딥페이크 성범죄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성인 대상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서도 선제적이고 능동적인 수사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됐다.
이에 따라 정부는 올해 6월부터 법률 개정을 통해 수사 범위를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경찰은 6월부터 3개월 동안 성인 대상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신분은닉수사 36건을 시행해 93명을 체포하고 이 중 1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올해도 이 수사기법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지난달 말 기준 작년 동기 대비 신분은닉수사 체포 인원이 387명에서 645명으로 66.7% 증가했다. 범죄 소탕의 핵심 수사 방법으로 자리잡아 가면서 디지털 성범죄 외에 다른 범죄에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마약이나 보이스피싱, 테러 등 조직범죄는 물론 도박, 성매매 같은 범죄들이 대표적 대상이다. 모두 폐쇄성을 특징으로 하는 범죄들이어서 신분을 숨기고서라도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은닉수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범죄가 날로 고도화되고 있어 기존 수사기법으로는 제대로 된 수사가 어렵다는 지적도 함께 나오고 있다.
다만 신분은닉수사 확대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들에 대한 신중한 검토도 필요해 보인다. 무고한 사람의 온라인 활동까지 광범위하게 감시될 수 있다는 사생활 침해 우려나 권한 남용 가능성에 대한 지적은 경찰이 수사 효율성에 매몰되어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다.
경찰은 이러한 우려들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며, 신분비공개수사의 경우 국회에는 반기별로, 국가경찰위원회에는 수사 종료 시 관련 자료를 제출하도록 법령상 규정돼 있어 이를 준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경찰청 주관으로 은닉수사 현장점검도 주기적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제도 개선을 위한 현장 수사관들의 의견도 적극 수렴하고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