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보 성덕대왕신종의 장엄한 울림이 22년의 침묵을 깨고 경주의 가을밤을 가득 채웠다. 국립경주박물관은 24일 오후 7시 박물관 종각에서 '에밀레종'으로 친숙한 성덕대왕신종의 타음 조사를 공개했다. 일반인에게 종소리를 직접 들려주는 것은 2003년 개천절 행사 이후 처음이다.
이날 행사에는 3800여 명의 신청자 중 추첨을 통해 선발된 771명이 참석했다. 이 숫자는 성덕대왕신종이 완성된 해인 771년을 상징한다. 행사에 참석한 한 시민은 "교과서에서만 접했던 신종의 실제 소리를 듣고 보니 감동이 벅차오른다"며 "천년 전 우리 조상들이 들었을 이 소리를 직접 체험하니 역사와 만나는 기분"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신라 경덕왕이 부친 성덕왕을 추모하기 위해 시작한 이 종은 30여 년간의 제작 과정을 거쳐 혜공왕 7년(771년)에 마침내 완성됐다. 높이 3.66m, 중량 18.9톤에 달하는 이 거대한 범종은 우리나라 현존 최대 규모의 종이자 통일신라시대 주조 기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특히 종신에 새겨진 천여 자의 명문과 화려한 비천상 장식은 당시 문화와 예술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으로 평가받는다.
성덕대왕신종의 독특한 음향적 특성은 과학적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600Hz 미만 저주파 영역에서 22개의 고유 주파수가 발생하며, 이는 유럽 최고의 종으로 여겨지는 영국 '그레이트 폴'의 2배에 달하는 수치다. 또한 168Hz대 음파의 미세한 간섭으로 9초 간격의 맥놀이 현상이 나타나 '끊어질 듯 이어지는' 신비로운 여운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음향학적 특성은 종의 미세한 비대칭성과 정교한 설계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박물관은 종의 안전한 보존을 위해 1992년 이후 정기적인 타종을 중단했으며, 이후 1996년, 2001~2003년, 2020~2022년 세 차례에 걸쳐 제한적인 타음 조사만을 실시해왔다. 최근 조사에서는 고유 주파수나 음색에서 큰 변화가 감지되지 않았으나, 전문가들은 종 상단의 용뉴 부분이 구조적으로 취약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기후변화에 따른 보존 환경 악화도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경주 지역의 최고 기온이 39도를 넘나드는 등 고온다습한 환경으로 변화하면서 야외에 전시된 금속 문화재의 손상 위험이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박물관은 성덕대왕신종을 위한 전용 전시관인 '신종관' 건립을 추진하기로 했다.
윤상덕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신종관에서는 평상시 종을 바닥에 내려놓아 용뉴의 부담을 줄이고, 기존 종각의 음향 특성을 분석해 최적의 종소리를 구현할 수 있도록 설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높이가 높아 관람하기 어려웠던 종의 상부까지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전시 환경을 개선하겠다"고 덧붙였다.
박물관은 향후 2029년까지 매년 9월 타음 조사를 공개하여 국민들에게 성덕대왕신종의 원음을 들려주는 동시에 과학적 데이터를 축적해 나갈 예정이다. 1300년 세월을 견뎌온 천년의 울림이 앞으로도 안전하게 후세에 전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