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영화 '기생충'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작곡가 정재일(43)이 생애 첫 관현악 작품을 선보인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위촉으로 탄생한 '인페르노'가 오는 25·26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세계 초연 무대에 오른다.
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이 2023년 정재일에게 제안한 이번 협업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츠베덴 감독은 "'오징어 게임' 사운드트랙을 접하자마자 그를 타깃으로 정했다"며 "강렬하고 흥미로운 음악을 창조할 수 있는 아티스트를 찾고 있었는데, 정재일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고 밝혔다.
23일 서울 종로구 프리마 아트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정재일은 "처음 악보를 제출할 때 성적을 기다리는 초등학생 같았다"며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는 처음에는 "경험도 실력도 부족하다"며 망설였지만, 츠베덴의 "잘하는 것을 하면 된다. 다만 스토리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조언에 용기를 얻었다고 회상했다.
15분 분량의 4악장 구성인 '인페르노'는 이탈리아어로 '지옥'을 의미한다. 정재일은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창작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13세기 베네치아 탐험가 마르코 폴로와 몽골 제국 쿠빌라이 칸의 대화를 다룬 이 환상적인 작품에서 특히 마지막 구절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인페르노에 빠져들며 그들과 하나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인페르노가 아닌 것을 발견하려 애쓸 것인가라는 소설 말미의 문장이 매우 인상 깊었다"고 정재일은 말했다. 그는 "음들이 서서히 축적되다가 화산 같은 폭발을 일으킨다"며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하면서도 명상적인 평화로움이 있지만, 동시에 비극적이고 종말적일 수도 있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츠베덴 감독은 완성된 곡에 대해 "어둡게 들리지만 그 속에 출구가 존재하고, 공포 속에서도 분출과 평안이 공존하는 이 시대에 위로를 전할 수 있는 힘찬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오케스트라는 카멜레온처럼 변화무쌍해야 하는데, 정재일의 이번 신곡이야말로 그런 특성을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라고 덧붙였다.
정음대 출신이 아닌 자신을 '근본 없는 음악인'이라고 소개하는 정재일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클래식 음악에 대한 애착은 남달랐다. "어릴 때부터 혼자 악보를 연구했고, 군 복무 시절에도 브람스 교향곡 악보를 몰래 가져갔다"며 클래식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정재일은 "영감을 찾아 헤매는 스타일이 아니다"라며 "일상의 작은 조각들이 여기저기 박혀있다가 어떤 화학반응을 통해 무언가가 나오는 경험을 자주 한다"고 자신의 창작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이번에도 많은 버티기와 실험, 학습을 거쳤다"며 "관객들이 공연장을 떠날 때 이 곡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기만 하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서울시향은 내달 27일 뉴욕 카네기홀에서도 이 작품을 연주할 예정이다. 츠베덴 감독은 "충분히 멘델스존이나 라흐마니노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곡"이라며 "정재일만의 고유한 이야기와 개성이 담긴 독특한 작품에 미국 청중들도 만족할 것"이라고 자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