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펼쳐진 특별한 문학 공연이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한 '문학주간 2025'의 대미를 장식한 '김혜순, 시하다-신작 시집 낭독회'에서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김혜순 시인이 다섯 명의 후배 시인들과 함께 약 2시간에 걸쳐 순수한 시의 목소리만으로 무대를 채웠다.
암전된 극장에 김혜순 시인의 사전 녹음된 '시인의 말'이 울려 퍼지며 시작된 이날 행사는 통상적인 북토크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인사말이나 질의응답 같은 부대행사 없이 오직 시 낭독에만 집중한 '하드코어 낭독회'였다. 파란 재킷을 입은 김혜순 시인이 무대 위 여섯 개 의자 중 맨 끝자리에 앉아 신작 시집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의 서시 '그리운 날씨'를 읽어 내려가는 것으로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됐다.
이어 김상혁, 신해욱, 안태운, 유선혜, 황유원 등 후배 시인들이 차례로 무대에 등장했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시를 낭독하기도 하고, 김혜순 시인과 행을 주고받으며 대화하듯 읽어나가기도 했다. 특히 '쌍둥이 자매의 토크'에서는 1955년생과 1998년생 사이의 40여 년 세대 차이를 뛰어넘는 절묘한 호흡을 보여줬고, '오르간 오르간 오르간'에서는 6명의 시인이 한 행씩 교차로 낭독하며 긴장감 넘치는 리듬을 창조해냈다.
쪽빛 조명이 비춘 무대는 마치 심해에서 펼쳐지는 연주회를 연상시켰다. 시인들의 다양한 목소리는 하나의 악기가 되어 김혜순의 시를 악보 삼아 언어가 음악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들려줬다. 무대가 어두워질 때면 시인들은 보면대의 조명을 켜고 낭독을 이어갔고, 관객들은 어둠 속에서 시 제목을 받아적으며 순수한 청각적 경험에 몰입했다.
김혜순 시인은 이번 시집에 대해 "최근에 창작된 작품들로, 나와 타자, 동식물과 사물의 경계를 허물고 시공간과 생사의 경계까지 넘나들려 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작품 속 유머는 진실 회피가 아니라 공동체가 절망에 빠졌을 때 피어오르는 매서운 연기 같은 것"이라며 "언어가 대상을 죽이는 차갑고 딱딱한 틀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시 장르의 사명"이라고 덧붙였다.
'죽음 3부작'으로 불리는 '죽음의 자서전', '날개 환상통',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이후 3년 만에 선보인 이번 15번째 시집은 이전 작품들보다 경쾌하고 유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캐나다 그리핀시문학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독일 세계문화의집 국제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국제적 인정을 받고 있는 김혜순 시인의 새로운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비가 내리는 금요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130여 석 규모의 소극장은 거의 만석을 기록했다. 문학계 인사들을 비롯해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들이 자리를 채웠고, 공연 종료 후에는 사인을 받으려는 긴 행렬이 이어졌다. 관객들의 손에는 시집 출간을 기념해 배포된 카네이션과 장미, 맨드라미 등의 꽃이 들려 있어 문학적 정취를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