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화단의 거장 천경자(1924~2015)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는 해, 그의 예술 여정을 집대성하는 대형 전시회가 문을 연다. 서울미술관에서 24일 시작되는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는 작가가 2006년 갤러리현대에서 연 생애 최후 개인전 '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 이후 약 20년 만에 개최되는 최대 규모의 회고전이다.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갤러리현대,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을 포함한 18개 기관과 다수 개인 수집가들의 협조를 받아 천경자의 핵심 장르인 채색화 80여 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1940년대 후반 초기작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작품들과 함께 저서, 도서 장정, 작업 과정을 담은 사진과 편지 등 아카이브 자료 150여 점도 함께 소개된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천경자를 대표하는 여성 초상화들이다. 대표작 '고(孤)'(1974)는 노란 의상에 만개한 꽃을 머리에 얹은 여인의 모습으로, 작가가 추구했던 진정한 고독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시인 노천명을 그린 작품(1973)은 월간 문학지성 표지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 꽃과 여인으로 표현된 인물의 품격과 감수성이 응축되어 있다.
작가의 여행에 대한 열정도 엿볼 수 있다. 천경자는 25년간 13차례에 걸쳐 세계 각지를 누비며 낙원을 찾아 헤맸다. '베니스 산 마르코 사원'(1972), '케냐, 춤'(1974), '나바호족의 여인'(1988) 등은 그의 여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10명의 기록화 작가 중 유일한 여성으로 선정되어 남긴 작품들도 공개되며, 특히 '꽃과 병사와 포성'은 국방부 협조를 받아 26일부터 전시될 예정이다.
2018년 경매에서 20억원에 낙찰되어 화제를 모은 '초원Ⅱ'(1978)도 관람객들을 기다린다. 1974년 아프리카 기행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광활한 자연 속에서 야생동물들과 어우러진 벌거벗은 여인을 묘사해 원시적 생명력을 표현했다.
천경자는 자신의 삶을 한 권의 책으로 여기며 나이와 같은 페이지 수로 작품명을 지었다. 모험가이면서 시대의 트렌드세터였던 그는 결국 91페이지로 인생을 마감했다. 문인 박경리는 그를 "꿈은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는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이지만 좀 고약한 예술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전시 기획에 직접 참여한 안병광 서울미술관 회장은 "갈등과 상처 위에 서 있는 천경자 선생을 모든 것을 환원한 최초의 작가, 세월이 지나도 존경받을 만한 예술인으로 기억하고 싶다"고 전했다. 안진우 이사장은 "천경자를 더 이상 위작 논란이 아닌 한 명의 예술가로 바라봐 달라"고 당부했다.
전시는 내년 1월 25일까지 계속되며, 11월에는 천경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 위의 미술관' 투어, 12월 6~7일에는 창작 연극 '슬픈 전설의 화가' 공연도 예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