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과 바람이 들려준 이야기…건축가 이타미 준의 삶과 예술 세계

2025.09.19
돌과 바람이 들려준 이야기…건축가 이타미 준의 삶과 예술 세계

재일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본명 유동룡, 1935~2011)이 생전에 남긴 글과 자료를 집대성한 책이 출간됐다. '이타미 준 나의 건축'은 그의 딸이자 동료 건축가인 유이화가 아버지의 흩어진 원고와 사진 자료를 한데 모아 엮은 작품집이다.

도쿄에서 재일한국인 2세로 태어난 그는 1964년 무사시공업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4년 뒤 건축연구소를 설립했다. 대학 시절까지는 한국명 유동룡을 사용했으나, 건축가로서 활동의 제약을 느끼고 이타미공항과 작곡가 길옥윤의 한자를 따서 예명을 만들었다. 일본 사회에서는 이방인으로, 한국에서는 경계인으로 여겨졌지만 그는 끝까지 한국인으로서의 뿌리와 정체성을 놓지 않았다.

제주도의 포도호텔, 방주교회, 수풍석미술관과 충남 아산의 온양미술관, 일본 홋카이도의 석채교회와 먹의 집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이 건축물들은 모두 지역의 풍토와 자연 재료를 중시하는 그의 철학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그 고장에서 나는 돌과 흙을 활용하여 지역 특성과 전통 기법을 건축에 녹여내는 것"을 추구했다고 말했다.

책에는 건축물의 탄생 배경과 설계 의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홋카이도 평원에 세운 석채교회에 대해서는 "광활한 풍경에 맞설 수 있는 건축이어야 한다고 직감했고, 점과 선으로는 버틸 수 없어 반드시 덩어리가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온양미술관 역시 해당 지역의 돌과 흙을 재료로 삼아 "지역성에 바탕한 야성적 건물"로 완성했다.

한국 전통 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과 통찰도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조선백자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개인의 미의식에 대한 거부와 억제가 오히려 조선을 만들어온 것"이라며 감탄을 표했다. 종묘의 존재를 과시하지 않는 겸허함, 분청 다완의 맑고 은은한 아름다움, 신라 불상의 고요한 빛남 등을 통해 자연스러움의 미학을 발견했다.

동시대 예술가들과의 교류 이야기도 흥미롭다. 인사동을 처음 소개해준 화가 박서보, 미니멀리즘의 대가 곽인식, 일본 건축가 시라이 세이이치 등과의 만남이 그의 예술 세계에 미친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김중업에 대해서는 "개성과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함과 창조를 위한 끝없는 자유로움"을 지닌 인물로 평가하며, "건축가의 중얼거림이 아닌 시인의 속삭임 같은 목소리"를 들었다고 회상했다.

이타미 준은 디지털 시대에도 끝까지 아날로그 드로잉을 고집했다. 스스로를 "마지막 남은 손의 건축가"라고 칭하며 "인간의 온기와 생명을 근저에 담는 건축, 그 지역의 풍토와 바람이 전하는 언어를 듣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현대 건축에 부족한 것은 "야성미와 따뜻함"이라고 진단하며 이를 회복하려 노력했다.

2003년 아시아인 최초로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고 프랑스 예술문화훈장을 수훈하는 등 세계적 인정을 받았지만, 그의 건축 세계의 뿌리는 언제나 한국의 전통 예술과 자연관이었다. 마치 파르테논신전처럼 "폐허가 되더라도 빛나는 건축"을 꿈꾸며 조형의 순수성과 강인한 염원을 담고자 했던 그의 일생이 이 책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