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해녀들의 숨결, 유전자에 새겨진 바다의 기억

2025.09.20
제주 해녀들의 숨결, 유전자에 새겨진 바다의 기억

바닷속 깊은 곳에서 살아온 이들에게는 세월의 흔적이 몸에 새겨진다. 높은 산지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티베트인들이 산소 부족 환경에 적응한 돌연변이를 보유하게 되었듯이, 제주의 해녀들 역시 혹독한 바다 환경이 유전자에 흔적을 남겼다는 연구가 나왔다.

멜리사 일라르도 미국 유타대 교수팀이 지난 5월 27일 국제학술지 '셀 리포트'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제주 해녀들의 DNA에서 물속 생활에 특화된 적응의 증거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제주 하도 지역에서 최소 3대에 걸쳐 물질을 해온 해녀 30명과 제주 비해녀 여성 30명, 서울 여성 31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제주해녀문화연구원의 2015년 조사에 의하면, 해녀들은 물질 시 40-50초간 숨을 멈춘 뒤 10-20초 동안 호흡하는 과정을 시간당 60회 가량 되풀이한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몸은 '잠수 반사' 현상을 보인다. 심장 박동이 느려지고 혈압이 상승하며, 뇌와 심장 같은 핵심 장기로 혈액을 집중시키기 위해 팔다리 혈관이 수축한다.

실험에서 해녀들은 10도 찬물에 얼굴을 담글 때 일반인보다 심박수가 더 크게 감소했다. 해녀의 평균 심박수 변화량은 분당 18.8회였던 반면, 해녀가 아닌 제주 여성은 12.6회에 그쳤다. 이는 오랜 훈련을 통해 체득한 후천적 특성으로 분석된다.

유전적 차원에서도 변화가 확인됐다. 제주도민들은 서울 참가자들에 비해 이완기 혈압이 10mmHg 높게 나타났는데, 이는 잠수 중 뇌혈류량을 증가시켜 장시간 숨 참기에 도움을 주는 선천적 적응으로 해석된다.

특히 'rs66930627'이라는 단일염기다형성(SNP) 유전변이에서 흥미로운 발견이 있었다. 제주도민의 33%가 이 변이의 C 대립유전자를 보유한 반면, 한반도 본토 주민은 7%에 불과했다. 역설적이게도 이 유전자는 혈압을 낮추는 기능을 한다.

연구진은 이를 이중 자연선택의 결과로 설명한다. 먼저 물질에 유리하도록 혈압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화했지만, 임신 중에도 물질을 했던 해녀들에게 고혈압은 임신중독증 등의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임신기 안전을 위해 혈압을 조절하는 유전자가 높은 비율로 보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런 귀중한 연구 대상이 사라지고 있다. 현재 해녀들의 평균 연령은 70대이며, 어린 시절부터 물질을 시작한 해녀들은 앞으로 5년 내 대부분 은퇴할 예정이다. 서울대 이주영 교수는 "어려서부터 추위에 노출된 경험을 가진 유일한 집단인 해녀들의 신체적 특성은 중요한 과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며 연구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 20일부터 21일까지 제주시 구좌읍 해녀박물관에서 제18회 제주해녀축제가 '숨비소리, 위대한 해녀들의 이야기'라는 주제로 열렸다. 전국에서 모인 550여 명의 해녀들이 참여한 가운데 거리행진과 물질경연, 불턱토크쇼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다.

축제에서는 해녀문화 보존에 기여한 해녀들에게 모범해녀 표창이 수여됐고, 배우 송지효가 해녀 체험담을 나누기도 했다. 해녀박물관에서는 12월 14일까지 '해녀 바당 작품전'이 열려 해녀들이 직접 창작한 회화, 공예, 문학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자 유엔 식량농업기구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된 제주 해녀문화는 단순한 생업을 넘어 바다와 인간, 세대를 잇는 공동체 정신을 담고 있다. 현재 중문 해녀회는 15명에서 7명으로 줄어들었지만, 69세 강옥래 회장과 같은 상군 해녀들은 여전히 후배들과 지식을 나누며 공동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도 제주 바다 위로 울려 퍼지는 해녀들의 숨비소리는 단순한 호흡이 아니다. 그것은 수천 년간 바다와 더불어 살아온 삶의 리듬이며, 유전자에 새겨진 바다의 기억이 만들어낸 생명의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