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삼합회원으로 변신한 발레리노들이 무대 위에서 치열한 쿵푸 대결을 펼치고, 성인 남성 키 높이의 나무 봉을 휘두르며 봉술 겨루기를 선보인다. 1980년대 홍콩 액션 영화를 연상케 하는 이 장면들이 오는 26~27일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현실이 된다.
홍콩발레단이 창단 46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관객과 만나는 무대로 선택한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1960년대 홍콩으로 옮겨 각색한 '로미오+줄리엣'이다. 프로코피예프의 클래식 음악과 전통 발레 기법에 쿵푸 동작과 홍콩 특유의 영화적 감수성을 접목시킨 독창적인 무대이다.
연출과 안무를 담당한 셉팀 웨버 예술감독은 24일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1960년대는 홍콩 사람들에게 '황금기'로 불리며 깊은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시대"라며 "이 시기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고 작품 의도를 밝혔다.
홍콩이 지닌 독특한 지리적, 문화적 위치에 주목한 웨버 감독은 "동양과 서양 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한 홍콩의 특성상 서구 클래식을 홍콩 스토리로 재창조하는 작업이 자연스러웠다"고 설명했다. 특히 한국에서의 데뷔 무대로 이 작품을 택한 배경에 대해서는 "한국인들이 1980년대 홍콩 시네마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며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 같은 작품들과 연결되는 감성을 통해 한국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작품 속에서 줄리엣은 상하이 재벌가의 딸로, 로미오는 홍콩 구룡성 삼합회 보스로 새롭게 태어났다. 무대에는 구불거리는 골목길과 화려한 치파오, 마작장과 네온사인 간판, 건물 외벽의 비계 등 옛 홍콩의 정취를 담은 요소들이 섬세하게 배치된다. 원작의 검투 장면을 쿵푸 액션으로 변환하기 위해 발레단원들은 반년간 매일 6시간씩 무술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2017년 홍콩발레단 수장으로 부임한 웨버 감독은 "기술적 완성도는 뛰어났지만 레퍼토리가 지나치게 광범위하다는 인상을 받았다"며 "클래식 작품들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홍콩만이 보유한 고유한 특색을 무대에 담아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취임 후 방향성에 대해 언급했다.
헤이디 리 홍콩발레단 대표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이후에도 글로벌 연결고리 역할을 지속하는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다양한 작품을 통해 한국에서 소개하려 한다"며 향후 계획을 공개했다. 중국 고전을 재해석한 '서유기'와 이소룡의 일대기를 다룬 '브루스 리' 등의 창작 작품들도 곧 완성해 선보일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공연은 '홍콩위크 2025@서울' 개막작으로 진행되며, 내달 25일까지 서울 전역에서 무용, 음악, 영화, 시각예술, 패션 등 14개 분야의 홍콩 문화 프로그램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