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압력으로 ABC 방송이 '지미 키멀 라이브!' 프로그램을 전격 폐지한 가운데, 미국 심야 토크쇼 진행자들이 대대적인 반발에 나서고 있다. 이들은 기존의 우회적 풍자 대신 정면 대결을 선택하며 트럼프 행정부와의 갈등을 한층 격화시키고 있다.
지난 17일 ABC의 대표 프로그램 중단 발표는 미국 방송계에 충격파를 던졌다. 키멀이 최근 피살된 우익 인사 찰리 커크 사건을 놓고 "MAGA 진영이 살해범이 자신들과 무관하다는 점을 입증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발언한 지 불과 이틀 후의 일이었다.
동료 토크쇼 호스트들의 반응은 신속하고 강경했다. CBS '더 레이트 쇼'의 스티븐 콜베어는 ABC 모기업 디즈니 경영진을 향해 "행정부의 보복 협박에 겁을 먹었다"며 신랄하게 질타했다. 그는 "전 미국민이 이런 노골적 언론 자유 탄압에 분노하고 있다"고 선언하며 동료 방송인에 대한 연대를 공개 표명했다.
ABC '데일리 쇼'는 더욱 직설적인 대응에 나섰다. 진행자 존 스튜어트를 '정부에 순종하는 애국적 호스트'로 소개하며, 트럼프의 마러라고 저택을 연상시키는 황금색 세트에서 대통령과 유사한 복장으로 등장했다. 그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필리핀 언론인 마리아 레사와의 대담에서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민주제도 해체에 반년이 소요됐다면, 트럼프는 재임 100일 내에 달성했다"고 날선 비교를 내놨다.
NBC '레이트 나이트'의 세스 마이어스는 트럼프를 과장되게 치켜세우는 방식으로 조롱했다. 소셜미디어에서 방송사들을 겨냥해 "(폐지) 결단을 내려라"고 압박하는 트럼프의 주요 타깃이 된 그는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언급이 있었다면 그건 AI의 소행"이라며 비꼬았다.
이번 분쟁의 배경에는 오랜 악연이 자리하고 있다. 2016년 선거 당시 지미 팰런 쇼에 출연하는 등 우호적 관계를 보였던 트럼프는 집권 후 이들과 급속히 틀어졌다. 콜베어와 키멀이 거침없는 정치 비판을 쏟아내자, 트럼프는 이들을 '가짜 언론'이라고 맞받아쳤다. 특히 콜베어의 "당신은 위대한 지도자가 아니다" 발언과 키멀의 "트럼프의 두뇌는 골프공보다 작다"는 조롱이 갈등을 심화시켰다.
반면 이들은 민주당 정치인들과는 호의적 관계를 이어왔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지미 키멀 라이브!'에서 악플 읽기 코너에 참여하며 친근한 모습을 보였고, 조 바이든 전 대통령도 콜베어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해 젊은 세대와의 소통을 도모했다.
키멀 쇼 폐지 결정에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작용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표면적으로는 키멀의 논란 발언이 원인이지만, 실제로는 디즈니의 정치적 계산이 더 큰 요인으로 보인다. 현재 대규모 인수합병을 추진 중인 디즈니로서는 연방통신위원회 승인이 필수적인 상황이다. 브렌던 카 FCC 위원장이 키멀 발언을 공개 문제삼으며 방송 허가 박탈 가능성까지 언급한 만큼, 수조원 규모의 합병 승인을 위해 정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이다.
유튜브, 넷플릭스 등 신규 미디어에 밀려 영향력이 축소된 심야 토크쇼들이 정치권 압력에 더욱 취약해진 현실도 이번 사태의 배경으로 지적된다. 방송사들이 정부의 제재를 감수하기보다는 문제적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쪽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