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리핀 전역에서 21일 수만 명의 시민들이 정치권 부패를 규탄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번 집회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 취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반정부 시위로 기록됐으며, 최근 아시아 전역에서 확산되고 있는 반부패 시위 물결에 필리핀이 합류한 것으로 평가된다.
시위 조직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마닐라 리잘 공원에만 약 3만 명이 운집했으며, 전국 20여 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집회가 진행돼 총 참가자 수는 5만 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경찰은 마닐라 집회 참석자를 8천 명 정도로 추산했지만, 학생단체와 시민사회, 종교계까지 참여하며 반부패 연대의 폭이 크게 확산된 상황이다.
시위의 직접적인 계기는 정부의 치수사업 관련 대규모 비리 스캔들이다. 필리핀 정부는 2023년부터 3년간 홍수 피해 방지를 위해 약 5500억 페소, 우리 돈 13조원 상당의 천문학적 예산을 배정했다. 하지만 올해 7월 실시된 점검에서 상당수 공사가 부실하게 진행되거나 아예 착수되지 않은 '허위 공사'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상원 국정감사에서 건설업체 경영진이 마틴 로무알데스 하원의장을 포함한 국회의원 17명에게 뇌물을 제공했다고 폭로하면서 정치권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 마르코스 대통령의 사촌이자 집권당 핵심 인사인 로무알데스 의장은 결국 직책에서 물러났으며, 프랜시스 에스쿠데로 상원의장도 관련 의혹으로 교체됐다.
랠프 렉토 재무장관은 이번 부패 사건으로 인한 국가 손실 규모를 최소 1조원에서 최대 2조8천억원으로 산정했다고 발표했다. 자연재해 위험이 세계 최고 수준인 필리핀에서 생명과 직결된 방재사업마저 부정의 온상이 됐다는 사실에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한 상태다.
시위 참가자들은 검은 옷을 입고 "우리가 벌어서 도둑들 배 불린다"거나 "이 체제를 규탄한다"는 피켓을 들고 행진했다. 일부 청년들은 홍수 피해자를 형상화하기 위해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참여하기도 했다. 최근 인도네시아 반정부 시위에서 저항의 상징이 된 일본 만화 '원피스'의 해적기도 집회 현장에 등장했다.
집회를 주도한 프란시스 아키노 디는 "홍수로 고통받는 서민들이 있는 반면, 부패 연루자들은 SNS에서 사치스러운 일상을 자랑하고 있다"며 분개했다. 마닐라 출신 간호학과 학생 알리 빌라에르모사(23)는 "직접 물에 잠긴 도로를 건넌 경험이 있다"며 "공공자금 횡령은 정말 수치스러운 범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목할 점은 시위일이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의 부친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1972년 계엄령을 발동한 지 정확히 53주년이라는 사실이다. 집회 장소인 리잘 공원 역시 1986년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피플파워' 혁명의 상징적 무대여서 시위의 의미가 더욱 부각되고 있다.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평화적 집회는 존중한다"면서도 "폭력 사태 발생 시에는 법적 대응이 불가피하다"고 경고했다. 정부는 이달 초 독립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관련 계좌 수백 개를 동결하는 등 수습책을 내놨지만, 시민들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 분위기다.
이번 필리핀 시위는 최근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부패 시위 열풍의 연장선상에 있다. 지난달 인도네시아에서는 국회의원 특혜 반대 시위 과정에서 배달 기사가 경찰 장갑차에 치여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고, 네팔에서는 SNS 차단 반대 시위가, 동티모르에서는 국회의원 차량 구매와 종신연금 반대 집회가 이어졌다. 아시아 Z세대들이 기성 정치권의 특권과 부패에 맞서는 새로운 저항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