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물가안정 목적으로 추진한 농축산물 할인지원사업에서 대형 유통업체들이 행사 개시 직전 제품 가격을 대폭 올린 뒤 할인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정부 지원금을 빼돌린 것으로 드러났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이런 행태를 파악하고도 적절한 제재조치를 취하지 않고 사실상 방관한 것으로 확인됐다.
감사원이 18일 공개한 농식품부 정기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6월부터 12월까지 주요 대형업체 6곳이 진행한 할인 대상 농산물 313개 품목을 분석한 결과 132개 품목에서 행사 시작 직전 판매가격이 인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45개 품목은 20% 이상 가격을 올린 뒤 정부 할인행사를 진행해 소비자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받지 못했다.
특히 한 대형업체는 지난해 12월 7일 시금치 할인행사를 앞두고 판매가격을 직전 주 100g당 589원에서 33.8% 급등한 788원으로 책정한 뒤 이를 기준으로 20% 할인을 적용했다. 표면적으로는 정부 지원 할인행사였지만 실제로는 이전 가격보다 오히려 비싸게 판매한 셈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농식품부가 2024년 9월 대형업체들의 이런 가격조작 계획을 사전에 파악했음에도 별다른 조치 없이 묵인했다는 점이다. 당시 농식품부 담당자는 업체 측으로부터 "도매가 상승으로 인해 가격을 조정했다"는 해명을 들었으나 자신도 납득하기 어려웠다고 인정하면서도 이를 그대로 방치했다.
정부의 할인지원사업은 유통업체가 농산물을 20% 할인 판매하면 구매자 1인당 1만원 한도에서 할인금액을 보전해주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할인 효과가 소비자가 아닌 유통업체의 수익으로 귀속되는 구조적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아울러 농식품부는 중소형 유통업체를 배제하고 대형업체 위주로 지원을 집중한 것으로 확인됐다. 2023년에는 대형업체 요청을 수용해 당초 계획에 없던 48개 품목에 33억8천만원을 추가 지원했고, 연말에는 중소업체를 임의로 제외한 채 대형업체에만 119억원을 몰아줬다.
지원 품목 선정 과정에서도 문제점이 지적됐다. 농식품부가 단순히 가격상승률만을 고려해 품목을 선정하다보니 소비자들이 실제로 많이 구매하는 오이, 마늘, 대파 등은 제외되고 상대적으로 구매빈도가 낮은 시금치 같은 품목에만 지원이 집중됐다.
한편 지난해 여름 배춧값 급등 사태에도 정부 기관들의 부적절한 대응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됐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는 가격 안정을 위해 비축한 봄배추 9천톤을 7-8월 안정기에 과도하게 방출해 9월 급등기에 대응할 물량이 부족해졌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도 저장업체 조사를 생략하고 배추 가격을 전망해 실제 가격과 40% 가까운 오차를 기록했다.
감사원은 농식품부에 유통업체 가격조작을 방지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감시체계 구축과 중소업체 차별 중단을 요구했다. 또한 소비자의 실제 구매패턴을 반영한 지원 품목 선정 기준 마련도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