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제19차 러시아 제재안 공개를 돌연 미루면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강력한 압박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복수의 EU 소식통에 따르면 집행위는 17일 27개 회원국 대사급 상주대표 회의에서 논의될 예정이던 19차 제재 초안 공유 계획을 급작스럽게 의제에서 제외했다. 이 결정은 15일 오후 각 회원국 정부에 전달됐으며, 새로운 발표 시점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이번 연기는 트럼프 행정부가 유럽에 대해 초강력 러시아 제재를 먼저 시행할 것을 요구한 시점과 맞물려 있어 주목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3일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모든 나토 회원국이 러시아산 석유 구매를 완전히 차단하고 중국과 인도에 최대 100%의 징벌적 관세를 부과한다면 미국도 강력한 대러 제재에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 역시 "유럽의 행동 없이는 우리가 전진하지 않을 것"이라며 EU가 미국보다 앞서 중국과 인도에 고강도 관세를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 행정부는 나토 회원국들에게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즉시 중단하는 동시에 러시아산 원유를 구매하는 아시아 국가들에 강력한 경제적 압박을 가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원래 19차 제재안에는 러시아 금융기관과 에너지 업체 6곳에 대한 추가 제재, 러시아의 결제 및 신용카드 시스템 타격, 암호화폐 거래소 제재, 원유 해상 밀반출에 사용되는 '그림자 함대' 선박들에 대한 확대 조치 등이 담길 예정이었다.
하지만 EU 내부에서는 트럼프 정부의 요구사항이 현실적으로 실현 어렵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EU는 관세와 제재를 별도 체계로 운영하고 있으며, 관세 부과는 합법적인 무역법상 근거가 확보되어야만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특히 중국은 EU의 세 번째 교역 파트너이자 최대 수입국으로, 50-100% 수준의 고율 관세 부과는 유럽 전역의 제조업 혼란과 생산비용 급증, 소비자 물가 상승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EU의 대중 무역적자는 약 3058억 유로에 달했으며, 가전제품과 중공업 장비가 주요 수입품목이다.
EU 회원국 간 합의도 난항이 예상된다.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는 에너지 수급의 상당 부분을 러시아산 석유와 가스에 의존하고 있어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러시아산 원유 금수조치에서도 예외를 인정받은 바 있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그동안 EU의 대러 제재 논의 때마다 자국 이익에 반한다며 반대 의사를 표명해왔다.
나토 회원국이지만 EU 비가입국인 튀르키예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튀르키예는 중국, 인도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러시아산 석유를 구매하는 국가로, 전체 석유 수입의 57%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EU가 이들 국가의 참여를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은 제한적이다.
일부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가 실질적인 해결책보다는 면피용 전략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유럽 매체 EU옵서버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제재를 거의 달성 불가능한 전제조건에 연결시켜 실제 조치를 지연시키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며 "나토 동맹국들이 석유 수입과 대중 관세 문제로 수개월간 논란을 벌인다면 크렘린궁은 추가적인 시간과 수익을 확보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EU는 현재 2027년까지 러시아산 화석연료 수입을 단계적으로 완전 차단한다는 자체 로드맵을 추진 중이다. 러시아산 원유 수입 비중을 2021년 27%에서 올해 2%로, 천연가스 수입 비중은 45%에서 13%로 대폭 축소한 상태다. 남은 수입량 대부분은 헝가리와 슬로바키아가 차지하고 있어 EU는 사실상 할 수 있는 만큼의 조치는 이미 취했다는 입장이다.
익명의 EU 외교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는 상당한 부담이 되지만,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으면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의 책임을 EU에 떠넘길 명분을 제공하게 될 것"이라며 딜레마를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