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트럼프 정부가 한국에 약속받은 3500억달러 대미 투자를 사실상 백지수표 방식으로 요구하면서 양국 간 관세협상 후속 논의가 심각한 교착 국면에 접어들었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 12일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과의 뉴욕 회담을 마치고 14일 귀국했으나, 핵심 쟁점인 투자 방식과 수익 배분 구조에서 양측 입장 차이를 전혀 좁히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와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워싱턴은 일본과의 선행 협정에 준하는 조건들을 한국에도 똑같이 적용하려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한국 정부가 펀드에 직접 현금을 출자하고, 투자 대상 결정권은 미국 측이 독점하는 구조를 원한다고 전해진다. 수익 분배 방식 역시 원금 회수 전까지는 5대5로 나누되, 그 이후 발생하는 모든 수익의 90%를 미국이 가져가는 조건을 제시한 상태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사항들을 그대로 수용할 경우 한국 경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에 직면할 수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우리나라 외환보유고가 4000억달러 수준으로 일본의 3분의 1에 불과한 상황에서 3500억달러를 미국 주도 펀드에 투입한다면 외환위기에 준하는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유럽연합이 채택한 방식을 모델로 한 대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민간 기업들의 대미 투자를 정부가 보증이나 금융 지원 등 간접적 방법으로 뒷받침하는 구조다. 하지만 미국 측이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어 협상 지연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성급한 타결보다는 장기적 국익을 고려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하고 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일본의 잘못된 선례 때문에 우리까지 곤경에 처했다"면서 "외환보유액 대부분을 미국이 좌지우지하는 펀드에 맡긴다면 외환위기 상황에 놓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구기보 숭실대 글로벌통상학과 교수도 "일본식 합의는 절대 불가능하다"며 "미국 역시 신속한 관세협정 마무리가 필요한 만큼 관세 타격을 어느 정도 감내하더라도 서두르지 말고 침착하게 협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협상 교착이 장기화될수록 한국 경제가 받는 피해는 커질 수밖에 없다. 특히 자동차 부문의 경우 일본차에 대한 관세가 16일부터 27.5%에서 15%로 인하되는 반면, 한국차는 여전히 25% 관세가 적용돼 경쟁력 격차가 더욱 벌어질 전망이다.
일각에서는 차라리 25% 상호관세를 감수하는 것이 3500억달러 투자보다 나은 선택일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최석영 법무법인 광장 국제통상연구원장은 "원만한 해결을 위한 노력은 계속하되 최악의 시나리오도 준비해야 한다"며 "국민들에게 미국 측 요구사항을 투명하게 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재 대통령실은 "한미가 서로의 영점을 맞춰가는 과정"이라며 "국익이 최대한 관철되는 지점으로 조율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으나, 구체적인 돌파구 마련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