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명문 오케스트라 라 스칼라 필하모닉이 미래 음악감독과 함께 인상 깊은 연주를 펼쳤다. 17일 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무대에서 아시아 최초 라 스칼라 극장 음악감독으로 임명된 정명훈의 바통 아래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베르디의 명곡들이 울려 퍼졌다.
247년 전통을 자랑하는 라 스칼라의 수장으로 2027년부터 활동할 72세 거장의 지휘 하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특별한 긴장감을 드러냈다. 1부 베르디의 '운명의 힘' 서곡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거쳐 메인 레퍼토리인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을 앞둔 연주자들의 표정에서는 완벽한 연주에 대한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무대에 등장한 정명훈이 약간의 정적 속에서 단원들을 바라보자 홀 분위기는 순간 서늘해졌다. 뒤쪽 타악기 연주자조차 긴장한 채 지휘자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과도한 긴장 탓인지 첫 악장에서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었으나, 트롬본과 목관악기 간의 미묘한 어긋남도 일부 청중들이 감지할 정도였다.
하지만 두 번째 악장부터는 세계적 명성에 걸맞은 안정된 연주가 이어졌다. 단원들은 흔들림 없는 정명훈의 지휘에 맞춰 차이콥스키 특유의 장엄하고 격렬한 선율을 완성해갔다. 웅대한 행진곡 스타일의 3악장에서는 라 스칼라 필하모닉이 최고 수준의 오페라 악단으로 불리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알레그로의 빠른 리듬에 바이올린 등 현악기군의 화려한 움직임과 관악기의 경쾌한 받쳐줌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순간이었다.
3악장이 '승리의 환희'로 마무리되자 몇몇 관객들이 무의식중에 감탄사를 내뱉었다가 이내 당황하며 입을 막는 장면이 연출됐다. 악장 사이의 적막은 기본 관람 매너이지만, 정명훈과 악단의 탁월한 호흡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관객 반응에도 정명훈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쳐도 좋다는 손짓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악장 간 전체 관객이 박수하는 유쾌한 광경이 펼쳐졌다. 마지막 4악장 완주 후 공연장은 멈추지 않는 박수와 환호로 가득 찼다.
이날 무대에서는 러시아 전통 연주법의 대표주자 니콜라이 루간스키의 협연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94년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에서 1등 없는 2등을 수상하며 국제적 피아니스트로 도약한 루간스키는 매년 한국 방문으로 국내 애호가들에게도 친숙한 연주자다. 그는 정명훈과 라 스칼라 필하모닉의 반주에 맞춰 러시아 후기 낭만파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대표작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완벽히 소화해내며 청중들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냈다.
1989년부터 36년간 쌓아온 정명훈과 라 스칼라 필하모닉의 음악적 신뢰관계가 정밀한 앙상블로 생생히 드러난 130분간의 무대였다. 정명훈과 라 스칼라 필하모닉, 루간스키의 협연은 18일 밤 부산콘서트홀에서도 한 번 더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