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비자 제도 개선 논의 본격화…'워킹그룹' 출범으로 해법 모색

2025.09.14
한미 비자 제도 개선 논의 본격화…워킹그룹 출범으로 해법 모색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공장에서 발생한 한국인 근로자 집단 구금 사태가 마무리되면서, 양국 정부는 이번 문제의 근본 원인인 비자 제도 개선에 본격 착수했다. 구금됐던 316명이 12일 전세기로 귀국한 가운데, 한미 양국은 국장급 워킹그룹을 신속히 구성해 비자 시스템 전반을 재검토하기로 합의했다.

이번 사태는 단기 상용(B-1) 비자와 전자여행허가제(ESTA)로 입국한 한국 기술진들이 공장 설치와 현지 인력 교육 업무를 수행하던 중 미국 이민당국의 대규모 단속에 걸리면서 촉발됐다. 한정애 국회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구금자 317명 중 170명이 ESTA, 146명이 B-1·B-2 비자를 소지하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주한미국대사관으로부터 장비 설치와 시운전 지원이 가능하다는 유권해석을 받았음에도 단속 대상이 됐다.

정부는 단계적 접근법으로 문제 해결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우선 B-1 비자와 ESTA의 허용 범위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설정하고, 미국 각 부처가 일관성 있게 적용하도록 요구할 계획이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미국 정부 내에서도 부처 간 해석이 달라 혼선이 더 커졌다"며 "일관된 법 집행이 이뤄지도록 미국과 협의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중장기적으로는 더욱 근본적인 제도 개선을 추진한다. 수개월간 미국에 체류하며 공장 건설과 인력 훈련을 담당하는 근로자들을 위한 '맞춤형' 신규 비자 카테고리 신설이 핵심 과제다. 또한 기술·공학 등 전문 직종을 위한 H-1B 비자의 한국인 할당량 확보와 2012년부터 추진해온 '한국 동반자법' 입법을 통한 E-4 비자 쿼터 신설도 재추진된다.

주한미국대사관 내 한국 기업인을 위한 전용 비자 데스크 설치도 추진된다. 조현 외교부장관은 "기업 투자 관련 업무 종사자들이 가장 신속하게 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별도 창구를 만들기로 미 국무부와 합의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협상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전망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한국인 근로자들의 석방 직후 "적법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며 "관광 비자로 들어와 공장에서 일한 것"이라고 비판적 입장을 드러냈다. 이는 한미 관세 후속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한국을 압박하려는 의도로 해석되고 있다.

미국의 복잡한 비자 체계도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미국은 이민에 해당하지 않는 비자만 20종 이상, 세부적으로는 80종이 넘는다. H-1B 비자는 연간 발급이 8만5천개로 제한되고 추첨제로 운영되며, 취득자 연봉 중간값이 10만 달러를 넘어 고소득 전문직 외에는 접근이 쉽지 않다.

이번 비자 문제는 한국의 3500억 달러 규모 대미 투자와 직결돼 있어 그 해결책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비자 제도 점검을 지시했다며 미국 측의 전향적 자세를 기대한다고 밝혔지만, 관세 협상과 연계될 경우 복잡한 양상을 띨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기업들도 긴장감을 보이고 있다. 미국 출장이 잦은 기업들은 기존 비자 관행을 재검토하고 있으며, 내년 1월 CES 전시회 참가에도 영향을 줄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업계에서는 "비자 규정의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외국 기업의 현지 투자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번 사태는 2008년 한국이 미국 비자 면제 프로그램에 가입한 이후 최대 규모의 비자 관련 외교 현안으로 기록됐다. 당시 노무현 정부에서는 이뤄지지 못했던 비자 면제가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성사된 것과 달리, 이번에는 한미동맹의 신뢰와 투자 협력의 지속성을 가늠하는 시험대가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