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정점을 찍었던 삼성전자 위기설이 하반기 들어 반전 신호를 보이고 있다. 1분기 세계 D램 시장 선두 자리를 SK하이닉스에 내주며 전 국민적 우려를 샀던 삼성전자가 스마트폰과 파운드리 영역에서 동시다발적 반격에 나서고 있다는 분석이다. 상반기 반도체 사업부와 SK하이닉스 간 영업이익이 16배 차이를 기록했던 상황에서도 주가가 상승한 것은 HBM 엔비디아 납품 기대감과 더불어 모바일 사업 회복세가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2분기 기준 19% 점유율로 애플(16%)을 앞서며 1위 탈환에 성공했다. 전년 동기 대비 삼성전자가 3%포인트 상승한 반면 애플은 2%포인트 하락한 대조적 행보다. 특히 '삼성폰의 무덤'으로 불리던 일본에서의 성과가 인상적이다. 카운터포인트 리서치 집계 결과 2분기 일본 스마트폰 시장에서 출하량을 전년 동기 대비 60% 늘려 시장점유율 10%를 달성했다.
일본 최대 통신사 NTT도코모 산하 도코모 온라인숍에서는 갤럭시 Z플립7과 Z폴드7이 7월 마지막 주 판매량 1, 2위를 기록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그동안 애플 독주 체제와 소니, 샤프 등 일본 브랜드 선호 현상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던 삼성전자로서는 의미 있는 변화다. 2015년부터 2023년까지 '한국산' 이미지 희석을 위해 '삼성' 대신 '갤럭시' 로고를 사용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MX사업부의 전략 전환이 있다. 기존 '원가절감' 중심에서 '차별화' 노선으로 방향을 틀며 공세적 신제품 출시에 나선 것이다. 연초 갤럭시 S25 시리즈를 시작으로 5월 엣지, 7월 폴더블 시리즈, 최근 S25 팬 에디션까지 1년간 6개 신제품을 쏟아냈다. 하반기에는 두 번 접는 '트라이폴드'까지 예고돼 있어 AI 기능과 혁신적 디자인으로 시장 주도권 확보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소비자 반응 변화도 고무적이다. 한국갤럽 7월 조사에 따르면 18~29세 연령층에서 갤럭시 사용률이 전년 34%에서 40%로 6%포인트 상승했다. 같은 기간 아이폰은 64%에서 60%로 4%포인트 하락해 격차가 30%포인트에서 20%포인트로 10%포인트나 줄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향후 구매 의향' 조사에서 갤럭시(46%)와 아이폰(50%) 선호도 차이가 지난해 24%포인트에서 4%포인트로 대폭 축소됐다는 점이다.
'갤럭시 AI'로 명명한 인공지능 기능 강화와 디자인 혁신이 2030세대 공략의 핵심 무기로 작용하고 있다. 구글 제미나이 AI 어시스턴트, 사진 편집, 다국어 통번역 등을 포함한 갤럭시 AI의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으며, '포토 어시스트' 기능의 3~6월 이용률은 전년 동기 대비 2배 증가했다. 역대 최박형 갤럭시 S25 엣지(5.8mm)와 일반 스마트폰 수준 두께(8.9mm)의 Z폴드7은 '가볍고, 얇고, 오래 가고, 사진이 잘 나오는' 스마트폰을 원하는 젊은 세대 니즈를 정확히 겨냥했다는 평가다.
이런 성과 뒤에는 올해 MX사업부 COO로 발탁된 최원준 사장의 역할이 크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고 한종희 부회장 별세 후 노태문 사장의 업무 부담 경감과 MX사업부 안정화를 위해 영입된 최 사장은 '갤럭시AI' 개발을 주도하며 사용자 중심의 제품 설계 철학을 강조해왔다. 그는 "AI 모바일 시대에는 단순한 얇음을 넘어 상황 이해와 의도 예측, 실시간 지원이 가능한 라이프스타일 적응형 스마트폰이 필요하다"고 비전을 제시했다.
반면 혁신의 아이콘이던 애플은 후발주자로 밀리는 양상이다. 9월 10일 공개한 아이폰17 시리즈에서 삼성이 먼저 선보인 '초슬림' 디자인을 뒤쫓는 모습을 보였다. 카메라 센서와 배터리 용량 확대, 냉각 시스템 개선 등을 내세웠지만 AI 도입 관련 새로운 소식이 없어 시장 반응이 냉담했다. 1시간 15분 발표에서 'AI'를 단 5번만 언급했고 자사 AI 기능인 '애플 인텔리전스' 개선사항도 거의 설명하지 않았다.
특히 후면 카메라 섬이 넓어진 '플래토' 디자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면서 애플의 디자인 혁신 능력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전문가 의견을 인용해 "더 많은 혁신을 갈망하는 애플 소비자들에게 점진적 개선 방식은 한계에 직면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상반기 삼성-하반기 애플' 전통 패턴이 흔들릴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반도체 분야에서도 파운드리 사업 반전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약 50조원을 투입한 미국 파운드리 공장이 테슬라와 애플이라는 새로운 대형 고객을 확보했다. 지난 8월 테슬라와 체결한 22조원 규모 2나노급 AI칩 'AI6' 위탁생산 계약은 삼성 단일 수주 기준 역대 최대 규모다. 자율주행, 로봇, 데이터센터 등 전방위 활용이 가능한 차세대 시스템반도체를 생산하게 된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TSMC보다 공격적 가격 정책으로 계약을 따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현재 TSMC의 3나노 웨이퍼 가격이 장당 2만 달러인 반면, 2나노는 최소 3만 달러 이상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TSMC는 엔비디아 물량으로 풀가동 중이어서 다른 빅테크 기업들의 가격 협상 여지가 제한적이다.
일부에서는 삼성의 2나노 공정 수율이 30~40%대에 머물고 있어 적자 위험을 안고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를 빅테크 실적 기록 구축을 위한 전략적 판단으로 평가한다. 송재용 서울대 석좌교수는 "초기 적자를 감수하더라도 실적 레코드를 쌓는 것이 현재 삼성에게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며 "첨단 공정은 양산 안정화 이후 원가 경쟁력이 개선되는 만큼 후속 고객 확보 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폴더블폰 시장에서는 화웨이와의 치열한 경쟁이 전개되고 있다. 카날리스 집계 결과 상반기 전 세계 폴더블폰 시장에서 화웨이가 점유율을 24%에서 48%로 두 배 늘려 1위를 차지한 반면, 삼성전자는 45%에서 20%로 하락하며 2위로 밀렸다. 세계 최초 트라이폴드폰 '메이트XT'를 비롯해 '메이트X6', '푸라X' 등이 중국 내수시장에서 호조를 보인 결과다.
하지만 세계 최대 프리미엄 시장인 미국에서는 삼성전자가 여전히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 제재로 화웨이가 구글 안드로이드 OS를 탑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삼성전자는 올해 2·4분기 미국 스마트폰 점유율을 전년 동기 23%에서 31%로 8%포인트 끌어올렸다. 갤럭시Z 폴드7은 출시 4주 만에 서유럽에서 25만대가 판매되어 전작 대비 2.5배 성장을 기록했다.
삼성전자는 이달 말이나 10월 중 첫 트라이폴드폰을 공개할 예정이다. 화웨이의 'Z자형' 방식과 달리 양쪽을 모두 안으로 접는 듀얼 인폴딩 구조로 차별화를 꾀한다. 외부 화면 약 6.5인치에서 완전히 펼쳤을 때 10인치 대형 디스플레이가 구현되며, 초기 생산량은 5만대 정도로 예상된다.
메모리 반도체에서는 HBM 경쟁력 확보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매달 엔비디아 납품 임박설이 나돌지만 품질 테스트 통과 소식은 아직 없다. SK하이닉스가 HBM3E 12단 초도 물량을 독점 공급하면서 삼성전자는 20~30% 낮은 단가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다. 다만 구형 D램과 낸드플래시가 '효자' 역할을 하고 있다. 8월 PC용 DDR4 D램 가격은 전월 대비 46% 급등해 6년 6개월 만에 5달러를 돌파했다.
조직문화 개선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송재용 석좌교수는 "삼성의 위기는 인텔 몰락 과정과 유사하다"며 "재무 중심에서 기술 중심 경영으로 전환하고 엔지니어들에게 과감한 권한 위임을 통한 신속한 의사결정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이건희·권오현 회장 시절의 기술 전문가 중심 문화로의 회귀가 답"이라며 "여전히 우수한 엔지니어들이 있는 만큼 이들에게 동기를 부여해 기술 중심 회사로 재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