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첫 조사로 드러난 '어린 돌봄 노동자' 3만여명…농사·간병까지 떠맡아

2025.09.17
국내 첫 조사로 드러난 어린 돌봄 노동자 3만여명…농사·간병까지 떠맡아

아픈 가족의 간병부터 집안일, 심지어 농사까지 담당하는 13세 미만 '가족돌봄아동'이 전국에 최대 3만1천여명에 달한다는 충격적인 실태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더불어민주당 서미화 의원이 17일 발표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건복지부 용역보고서에 따르면, 건강한 성인 가구원이 부재해 주된 돌봄 역할을 맡게 된 아동 규모가 최소 1만7천647명에서 최대 3만1천322명으로 추산됐다.

사회보장 행정데이터를 활용한 이번 연구는 국내 최초의 전수 추정치로, 그동안 제도적 사각지대에 방치됐던 이들의 존재를 구체적 수치로 입증했다. 지역별 분포를 살펴보면 경기도가 3천906명으로 가장 많았고, 서울 2천519명, 경북 1천329명, 경남 1천275명, 부산 1천145명 순으로 집계됐다. 광주·전남 지역에서도 최소 1천500명에서 최대 2천600여명에 이를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주목할 점은 돌봄이 발생하는 원인이 지역 특성과 밀접한 연관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대규모 산업단지가 위치한 경남과 울산에서는 산업재해로 인한 장해급여 수급 가구 비율이 높았으며, 고령화가 심각한 전남·제주·전북 지역은 노인맞춤돌봄 수급 비율이 두드러졌다. 이는 지역별 산업구조와 인구 특성이 아동 돌봄 부담으로 이어지는 구조적 문제를 시사한다.

이들 가정의 경제 상황은 극도로 열악한 것으로 드러났다. 6∼12세 가족돌봄아동 가구 중 근로소득을 보유한 비율은 44.5%에 불과해 전체 아동가구(81.5%)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쳤다. 연평균 가구소득 역시 2천218만원으로 일반 아동가구 평균(7천909만원)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보고서는 이들 아동이 단순한 돌봄을 넘어 설거지, 청소, 형제자매 돌보기, 부모 식사 준비 등 광범위한 가사노동을 담당하고 있으며, 일부는 농사일까지 떠맡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과정에서 신체적·정서적 고통뿐 아니라 사회적 고립과 경제적 어려움 등 다중적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한편, 돌봄 현장에서는 성인 돌봄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요양보호사로 10년간 일해온 김순심씨(69)는 최근 돌봄노동자들이 직접 출연한 연극 무대에 서며 "돌봄은 생명력 있는 중요한 일임에도 최저임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재가 요양보호사들은 월 60시간 미만 근무 시 4대보험과 퇴직금 혜택을 받지 못하며, 업무 범위를 벗어난 요구를 받는 경우도 빈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지난해 8월 가족돌봄청년 지원 시범사업을 시작했지만, 13세 미만 아동은 대상에서 제외돼 사각지대에 남아있었다. 다행히 올해 제정된 '가족돌봄 등 위기아동·청년 지원법'을 통해 법적 지원 근거는 마련됐으나, 실질적 지원체계 구축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현재 전국에 4곳뿐인 청년미래센터로는 전수 발굴이 어려운 상황이다.

내년 3월 '의료·요양 등 지역 돌봄의 통합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을 앞두고 각 지자체는 통합돌봄체계 구축에 분주한 모습이다. 경기도는 돌봄통합지원단을 신설해 공무원 600여명을 대상으로 역량강화 교육을 실시했으며, 논산시와 원주시 등도 지역 특성에 맞는 통합돌봄 모델 구축에 나서고 있다.

서미화 의원은 "가족돌봄아동들이 제도적 지원 대상자로 인식되지 못해 방치되는 사례가 많다"며 "학교, 병원 등 지역사회 차원에서 조기 발굴하고 지원하는 시스템을 시급히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지역별 산업구조와 인구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실태조사와 지원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