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녀를 가장한 보이스피싱 문자에 속아 개인정보를 제공했다가 명의 도용으로 거액의 비대면 대출 피해를 당한 사건에서 금융기관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최고법원 결정이 내려졌다. 충실한 신원 확인 과정을 거쳤다면 정당한 대출로 인정한다는 취지다.
15일 법조계 소식에 따르면 대법원 2부는 A씨가 저축은행을 대상으로 제기한 채무부존재 소송에서 피고 승소한 원심을 최종 확정했다. A씨는 2022년 7월 딸로 위장한 미상의 인물로부터 "휴대폰이 고장 났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받은 후 요청에 응해 면허증 이미지, 통장 정보와 암호 등을 건네주었다. 또한 지시에 따라 스마트폰에 원격조작 프로그램을 설치하기도 했다.
사기범은 이 정보를 활용해 A씨 명의로 전자인증서를 생성하고 비대면 방식으로 저축은행 계좌를 만든 뒤 9천만원을 융자받았다. 당시 저축은행은 인증 과정에서 면허증 이미지 확인, 타행 계좌 소액 입금을 통한 암호 검증, 휴대폰 명의자 인증, 신용조회를 통한 건보자격확인서 점검 등 다양한 확인 단계를 밟았다.
피해 사실을 안 A씨는 "명의 도용으로 이루어진 계약은 효력이 없다"며 법원에 호소했다. 1심에서는 A씨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재판부는 제출된 면허증이 현장에서 직접 촬영한 원본이 아닌 복사본이라는 점을 들어 실명 확인이 미흡했다고 판단했다. 비대면 거래의 위험성을 고려할 때 금융사고 손실은 기본적으로 금융회사가 감수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2심은 정반대 결론을 내렸다. 저축은행이 시행한 여러 인증 절차를 종합해 볼 때 A씨나 그 대리인의 의지에 따라 관련 서류가 전송되었다고 여길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비대면 실명 확인 과정에서 꼭 현장 촬영 파일만 제출해야 한다는 법적 근거도 없다고 봤다.
대법원 역시 원심의 논리를 지지했다. 최고법원은 정당한 사유가 있는지를 가르는 기준으로 △수신자가 실시한 본인 확인 절차가 당시 기술 수준에 적합했는지 △관련 규정에 따라 거래 특성에 맞게 본인 확인 조치나 피해 방지 노력을 충분히 했는지 △전자문서에 담긴 의사표시의 법적 행위 내용과 성격 등을 종합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저축은행이 실명확인증표 복사본 제출, 기존 계좌 인증, 휴대폰 인증, 전자인증서 인증, 신용정보 조회 등 복합적인 인증 방법을 통해 대출 신청이 A씨의 의사에 기반한 것임을 확인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비대면으로 사진 파일을 제출받아 행정안전부 신분증 진위 확인 시스템을 통해 검증하는 절차의 특성상 현장에서 바로 촬영한 파일과 사전에 촬영된 파일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번 판결은 정부가 추진 중인 '무과실 배상책임제' 정책 방향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정부는 최근 금융사의 과실 여부와 무관하게 피해액 일부나 전액을 금융사가 의무적으로 배상하는 제도 법제화를 예고한 바 있다. 아직 법률 개정 단계이지만 연말까지 입법을 목표로 하고 있어 향후 판례 기준과 금융 실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