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 무역협상 세부조건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을 찾았던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14일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며 취재진의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과의 뉴욕 회담 결과가 성과 없이 끝났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협상 관련 당국자들은 "일본이 지난 4일 미국 요구사항을 대부분 수락하는 협정에 서명한 후 미국의 압력 강도가 변화했다"면서 "대통령이 '국익에 해로운 타결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힌 가운데 협상 장기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했다.
미국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의 딘 베이커 선임경제학자는 최근 발표한 분석에서 한국과 일본의 대미 투자 약속 방식에 대해 "만일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조건과 조금이라도 유사하다면, 양국이 이런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은 극도로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평가했다.
한국과 일본은 트럼프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부과한 25% 전면관세 및 자동차 25% 개별관세를 15%까지 인하하는 조건으로 각각 3500억 달러(약 488조원)와 5500억 달러(약 767조원) 규模의 대미 투자를 공약했다.
미국은 지난 4일 일본과 ▶투자처는 미국이 결정하고 ▶일본은 45일 내 투자금을 송금하며 ▶투자금 회수 전까지는 미일이 50대 50 배분, 회수 이후에는 미국이 90%를 가져간다는 조건으로 협상을 완료했다. 반면 한국과의 논의는 교착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일본의 '전면 항복'을 이끌어낸 미국은 한국에게도 사실상 동일한 조건의 타결문 서명을 강요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일본이 도대체 어떤 판단으로 악례가 될 타결에 서명했는지 납득하기 곤란하다"며 "일본과의 타결 후 미국은 한국과 접점을 찾아가던 영역까지 사실상 원점으로 되돌리고 일본 수준의 타결을 강압하는 국면"이라고 전했다.
그는 "미일 타결문에는 투자처 선정 시 '협의' 조항이 있지만, 미국이 사업성이 전무한 투자처를 정해 일방 통지하는 것도 협의"라고 했다. 그러면서 "러트닉 장관이 예시로 든 알래스카 LNG 사업도 성공 전망이 불확실하다"며 "사업 실패 시 일본은 투자금 전액을 상실하고, 성공해도 회수에만 수십 년이 걸리는 구조"라고 덧붙였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미국과의 무역 협상을 끝낸 직후인 지난 7일 "관세 협상에 일단락이 난 현재가 적당한 시점"이라며 총리 직책에서 물러났다.
반면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1일 기자회견에서 "협상에서 드러난 내용은 거칠고 극단적이고 지나치고 비합리적이고 상식 밖"이라며 "국익에 해가 되는 결정은 절대 내리지 않을 것이며, 합리성과 공정성을 벗어난 그 어떤 협상도 거부한다"고 말했다. 이어 "(타결에)사인하지 못했다고 질책하지는 말아달라"며 장기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내비쳤다.
협상단 관계자는 "투자금 3500억 달러 중 1500억 달러를 조선업에 한정해 미국의 자의적 결정을 최소화하려던 논의도 이미 '희망사항'이 된 상황"이라며 "외환보유고가 4113억 달러에 불과한 한국 처지에서 3500억 달러를 사실상 현금으로 제공하라는 요구를 수용하기보다는 차라리 자동차 25% 개별관세를 감내하는 편이 낫다는 내부 의견도 나온다"고 밝혔다.
CEPR의 베이커 역시 "미국이 15%로 인하한 전면관세를 25%로 복원하면 한국의 대미 수출은 국내총생산(GDP)의 0.7%인 125억 달러 축소될 수 있다"며 "125억 달러를 보호하려고 3500억 달러를 왜 제공해야 하는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가 요구한 3500억 달러의 20분의 1(175억 달러)을 피해 기업과 근로자를 지원하는 데 활용하는 편이 더 유익"이라고 주장했다.
외교소식통은 이와 관련 "이론적으로 일본과 유사한 방식의 타결이 성사될 경우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지방선거와 차기 대선을 앞두고 각 주에 선거용 '포퓰리즘 사업'에 자금을 요구하더라도 무방비가 된다"며 "가령 지방 도로나 교량을 건설하는 데 투자금이 사용될 경우 투자금 회수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일각에서는 일본이 '빈 수표'를 건네는 방식의 협상에 합의한 배경에 대해 "핵심인 자동차 개별 관세를 포함한 전체 관세를 낮춰 시간을 확보할 의도"라는 관측도 나온다. 일단 자동차 분야에서 경쟁 중인 한국보다 유리한 관세로 수익을 극대화한 후 향후 불합리한 요구가 나올 경우 투자 리스크와 보복성 관세 인상 사이에서 손익을 계산해 판단하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또 유럽 민간기업의 자발적 결정으로 이루어진 6000억 달러(약 836조원)의 신규투자 방식의 대미 투자를 하기로 한 유럽연합(EU)의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외교 소식통은 "유럽은 상대적으로 합리적 투자 형태를 인정받는 과정에서 핵심 산업인 농축산물 시장을 사실상 완전히 개방했다"며 "쌀과 쇠고기 등 식품 안보와 관련해 극도로 민감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는 한국은 유럽과 달리 대미 협상에서 꺼낼 카드가 상대적으로 한계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