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 관세협상 후속 논의가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대통령실은 마감 시한에 압박받더라도 우리 기업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합의서에는 결코 서명할 수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3500억달러 규모 대미 투자 펀드 관련 세부 협의가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강력한 메시지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16일 용산 대통청에서 언론진과 만나 "특정 국가와의 통상협상이 이토록 오랜 기간 막힌 상황은 처음 겪는 일이어서 상당한 어려움을 체감하고 있다"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마감일에 쫓겨 우리 기업계가 심각한 타격을 받을 협정에 도장을 찍을 수는 없다"고 단언했다.
이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국가이익'이라는 추상적 용어를 쓰지만, 구체적으로 파고들면 결국 기업계의 실익과 바로 연결되는 문제"라며 "신속한 협상 마무리라는 목표는 여전히 유지하고 있지만, 급박한 일정 때문에 국익에 치명적 악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고 부연설명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확고한 방침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 관계자는 "이 대통령께서는 미국 측의 요구사항을 그대로 수용하라고 지시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기업계의 손실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겠다는 철학을 갖고 계신다"며 "평상시에도 대통령께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투입하시는 분야를 살펴보면 경제와 민생이 우선이고, 그 다음으로 한미 협상에 집중하고 계신다"고 설명했다.
협상 교착국면이 지속되면서 정부는 통상 책임자를 연이어 미국에 급파하고 있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14일 새벽 빈손으로 귀국한 직후, 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이 15일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김 장관은 지난 11~12일 뉴욕에서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과의 회담을 통해 핵심 쟁점 해결을 시도했으나 성과 없이 돌아온 바 있다.
미국 측이 한국에 요구하는 3500억달러 투자 실행 방안을 둘러싸고 양국 간 견해차가 여전히 좁혀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미국은 한국의 직접적 현금 투입이나 특수목적회사 설립을 통한 자금조달을 선호하는 반면, 우리 측은 보증이나 융자 등 간접적 방식으로 부담을 덜고자 하는 입장이다. 투자 수익 분배 구조에서도 미국이 제시하는 일본식 모델에 대해 우리 정부는 "비현실적"이라며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여 본부장의 파견을 협상이 단기간 매듭짓기 어려운 장기전 양상으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하고 있다. FTA 체결과 WTO 분쟁 대응 등 통상 업무 전반을 총괄해온 실무 전문가인 여 본부장은 워싱턴 DC 덜레스 공항 도착 후 특파원들에게 "악마는 세부사항에 숨어있다"며 "디테일한 부분을 놓고 치열한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USTR 대표 면담 등 전방위적 접촉을 통해 국익 반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